[논설위원이 만난 사람/권순택]김정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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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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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JP에 권한대행 맡겨 YS DJ와 경쟁시키려 했다”

87세 고령의 김정렴 씨는 오른쪽 귀에 보청기를 끼고 얼굴에는 검버섯이 피어 있지만 주요 사건에 대한 기억이 또렷했다. 그의 등 
뒤로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가 새겨진 기념 접시가 보인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87세 고령의 김정렴 씨는 오른쪽 귀에 보청기를 끼고 얼굴에는 검버섯이 피어 있지만 주요 사건에 대한 기억이 또렷했다. 그의 등 뒤로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가 새겨진 기념 접시가 보인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김정렴 회장(87)은 박 대통령을 가장 잘 아는 몇 사람 가운데 하나다. 김 회장은 1961년 5·16쿠데타부터 1979년 10·26까지 박 대통령 집권 18년 6개월 가운데 무려 16년 동안 차관 이상 고위 공직을 지냈다. 재무부 이재국장을 거쳐 재무부와 상공부 장차관을 지낸 그는 특히 박정희 시대의 절반에 해당하는 9년 2개월(1969년 10월∼1978년 12월) 동안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그는 ‘박정희 경제사령관’의 총참모장이었다.

김 회장은 1983년 여름부터 회고록 집필에 몰두했다. 1990년 처음 출간된 ‘한국경제정책 30년사’와 1997년에 나온 ‘아, 박정희’를 포함해 한글 일본어 영어 회고록이 5권, 중국어와 영어 번역본이 각각 1권이다. 세계은행에서 출판한 영문 회고록은 개발도상국 경제관료들의 필독서가 됐다. 그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올해 4월 출판한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2006년 7월 출판)의 영역본 ‘From Despair to Hope’를 두 번 교정보면서 오른쪽 눈의 시력이 회복되기 어려울 정도로 손상됐다. 그는 취미를 묻자 “회고록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달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도화동 성우빌딩 8층 박대통령기념사업회에서 김 회장을 만났다. 3평 정도 되는 회장실 벽에는 박 대통령 사진이 유일한 장식물이었다. 김 회장의 건강 얘기부터 시작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협심증 부정맥 전립선비대증이 있습니다. 귀도 잘 안 들리고 단장을 짚고 다닙니다. 의사가 많이 걸으라고 해서 일주일에 한 번 친구들과 골프장에 가서 18홀 가운데 파5홀과 오르막에서는 카트를 타고 12홀 정도는 걷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났고 육사 출신도 아닌데 박 대통령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습니까.

“한국은행에 있다가 1959년 송인상 부총재가 재무장관으로 나갈 때 이재국장으로 기용돼 자유당 정부, 허정 과도정부, 장면 민주당 정부 초기까지 일했어요. 5·16이 나니까 구(舊)정권 사람이라고 숙정 대상에 올랐지요. 그런데 1953년 한국은행 기획조사과장 때 제1차 통화개혁을 기안한 경력 때문에 1962년 5월 17일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 공관에 불려가서 통화개혁에 관한 브리핑을 하면서 처음 박 대통령을 만났지요. ‘통화개혁은 전쟁이 끝나고 물가가 뜰 때, 막대한 경제부흥 자금이 필요할 때 하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재정 금융 외환 정책으로 해야 한다. 만약 한다면 원조를 받는 나라니까 미국 정부와 사전에 합의해야 한다’고 소신껏 말씀드렸어요.”

―박 대통령은 마지막 일기(1979년 10월 17일)에서 ‘모든 것은 후세에 사가(史家)들이 공정히 평가하기를 바랄 뿐’이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공정한 평가를 할 시기가 됐을까요.

“우리나라의 많은 학자들은 ‘박 대통령은 쿠데타 했다. 정부 주도로 경제정책 끌고 갔고 3선 개헌과 유신으로 독재정치를 해서 연구할 가치가 없다’고 했어요. 세계은행이 개발도상국가들을 대부분 지원했지만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만 성공했어요. 1990년대에 미국 소장학자들이 박 대통령 케이스를 연구하기 시작하자 한국 학자들도 연구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군사독재정권이라며 연구하는 사람이 드물었어요.”

―박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높은 지지를 받는 이유는 뭘까요.

“박 대통령께서 가장 신경 쓴 것이 농민이고 그 다음이 공업화입니다. 박 대통령은 가난한 집에서 돈이 없어서 학비가 안 들어가는 대구사범학교에 갔어요. 그는 국민학교 교사 3년 의무 근무기한이 끝난 뒤 만주 신경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다니면서 일본이 부국강병(富國强兵)하게 된 과정을 배웠어요. 그는 한국을 부국강병한 나라로 만들 마스터플랜을 갖고 있었습니다. 농촌에 대한 애정이 새마을운동으로 성과가 나왔습니다. 구로공단을 만들어 시골의 딸들에게 일거리를 주니 월급 안 쓰고 돈 모아 부모에게 보냈고 시골의 아들들은 기능공이 됐어요. 박 대통령 덕분에 농촌 아들과 딸이 직장 얻어서 잘살게 된 걸 직접 체험했으니 높은 평가가 나오는 겁니다. 하지만 10∼20년 후 박 대통령의 혜택을 받은 세대가 사라지면 평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는 비서실장 때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1974년 8월 15일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을 꼽았다. “당시 나는 육 여사 바로 뒤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나하고 문세광하고 육 여사가 사선(射線)의 일직선상에 있었지요. 총소리가 난 뒤 사모님이 고개를 숙여 달려갔더니 머리에서 피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각하께서 빨리 서울대병원으로 모시고 가라고 지시해 각하가 연설을 다시 할 때 나는 병원으로 갔지요.”

그는 1945년 8월 6일 아침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 당시 일본군 견습사관이었던 그는 폭심(爆心)에서 약 1km 떨어진 히로시마군관구교육대 교정에 집합해 있었다. 그는 기적적으로 피폭 상처가 완치돼 귀국했고 큰 후유증 없이 지금까지 지냈다. 그래서인지 그는 웬만한 일로는 크게 놀라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일정 통제, 면회시간 배분, 검토사항 선택을 통해 권력을 행사한다고들 하는데요.

“나는 권력을 행사한 적이 없어요. 예를 들면 비서실이 면회할 사람을 취사선택하면 힘이 생기지요. 그러나 나는 의전수석한테 면회 요청이 오면 용건을 적어서 각하께 보고하게 하고 각하가 직접 사람과 용건을 봐서 선택하도록 했어요. 인의 장막을 치지 않은 겁니다. 다만 급한 일이 있을 때는 수석비서관을 데리고 들어가 보고드리게 했지요.”

―10·26이 없었다면 박 대통령은 종신 집권을 했을까요.

“박 대통령 마지막 임기가 1984년 말까지였는데 1978년 7월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뒤 저하고 유혁인 정무수석에게 ‘유신헌법 개정하자. 그러고 임기 1년 남기고 그만두겠다. 김종필을 총리 시켜 내가 그만두면 권한대행 하다가 김영삼 김대중과 경쟁해서 대통령 선출하면 된다’고 했어요.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신직수 씨를 법률특보로 임명해서 비밀작업도 시켰어요. 임기 전에 은퇴해서 나무 심고 가꾸면서 여생을 보내겠다며 서울 근교에 집 지을 땅을 준비하도록 했어요. 경부고속도로 수원∼오산 구간에 있는 비상착륙장 서쪽 구릉지대를 물색해 대통령께 항공사진까지 보여 드렸지요. 대통령은 ‘내가 지금 땅을 사면 말이 많을 테니까 현대 정주영 회장 보고 사라고 그래. 내가 그만두면 다시 사면 되지’라고 했고, 실제로 정 회장이 그 땅을 샀어요. 나중에 어떻게 활용했는지는 모르지만.”

박 대통령의 대표적인 과(過)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더니 ‘영원한 비서실장’다운 답변이 돌아왔다.

“글쎄 3선 개헌도 그 양반이 아니었다면 그 후 안보가 어려워졌을 거고, 유신은 집행과정에서 잘못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때 유신은 안 할 수 없었습니다. 카터 대통령이 주한미군 2개 사단을 빼낸다고 하는데 그러면 대한민국 없어지는 겁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가족이나 측근 비리 때문에 임기 말 레임덕을 겪고 퇴임 후 불행해졌습니다. 이런 일을 막을 수 없는 걸까요.

“비서실을 잘 짜야 합니다. 비서실이 크면 절대 안 됩니다. 대통령과 국무회의에서 정책을 결정하면 집행하는 것은 행정부 관료들이거든요. 직업공무원들은 다 엘리트예요. 이들이 열심히 뛰어야 하는데 청와대 비서실과 국무총리실이 커지고 위원회가 많으면 안 됩니다. 저는 비서실장 되자마자 장차관 경험을 살려서 비서실 절대 크게 안 하겠다고 했고 별정직 110명, 기능직 117명 정원을 끝까지 안 늘렸습니다. 대통령비서실에 직업공무원 훈련을 받은 사람은 적고 마당발이 많으면 행정부에 쓸데없는 간섭하고 명함 뿌리다 비리가 생깁니다. 임기 말이 되면 한밑천 잡으려는 것이 인지상정이죠.”

―박 대통령은 측근이나 친인척 관리를 어떻게 했습니까.

“친인척에게 정보비서관을 일대일로 365일 전담시켜 월별로 보고하도록 했어요. 친인척은 김종필 육인수 한병기 씨 외에는 청와대 출입을 금지했고요. 어렵게 사는 친척은 트럭도 사주고 어떤 조카는 공항면세점 운영권도 줘서 관리했어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정치활동과 대권 도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지만 김 회장은 ‘어려운 질문’이라며 답변을 피했다. 기념사업회 회장으로서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틀 숙고한 뒤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박 대통령께서는 육 여사가 돌아가신 뒤 큰따님(박 전 대표)과 국내외 문제를 많이 상의했는데 당시 북의 위협이 우심했고 대미관계가 우려됐기 때문에 대통령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을 겁니다. 박 의원은 박 대통령을 닮아 강직 청렴하고 나라를 위해 옳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추진하는 편입니다. 포퓰리즘에 빠지지 않을 타입이어서 영국 대처 총리처럼 유능한 지도자로 성장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이 11월 15일 개관할 예정인데….

“전시 공간이 협소해서 왜 이런 건 전시하지 않나 하는 불만이 많이 나올 거예요. 국고보조 200억 원과 모금 442억 원 가운데 230억 원이 건축비와 부대사업비로 들어갔어요. 남은 기금으로 매년 15억∼16억 원 정도의 이자수익이 나올 것으로 예상합니다. 매년 기금에서 10억 원 정도를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기념관은 국민이 와서 보고 아버지와 할아버지 때 박 대통령하고 이렇게 했구나 하는 걸 알 수 있는 국민교육도장이고 박 대통령 연구센터가 될 겁니다. 박 대통령 관계 자료를 모두 수집했어요. 국내외 학자들이 연구도 하고 세미나도 할 겁니다.”

마지막으로 김 회장에게 “박 대통령이 지금 살아 있다면 뭐라고 할 것 같습니까”라고 물었다.

“‘포퓰리즘은 절대 안 된다, 우리가 선진국 문턱까지 갔지만 잘못하면 추락한다’고 하실 겁니다. 국력이 커지면 후생복지가 늘어나는 건 당연하지만 근로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공짜는 없다는 것이 박 대통령 시절 후생정책의 근본이었습니다. 북한이 계속 위협하고 있는데 우리가 안심할 수 있을 때까지는 국방을 튼튼히 하고 경제 성장을 이루기 위해 한국식 민주주의 해야 한다고도 하실 겁니다. 요즘 시대에 잘 먹히지 않겠지만.”

김 회장은 64년 동안 해로한 부인을 4월 먼저 보냈다. 지금은 딸 부부가 4층에 사는 빌라의 1층에서 가정부의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다.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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