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재의 인생홈런]탁구 치던 ‘우리 영식이’ “요즘은 샌드백도 칩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6월 22일 23시 00분


정영식 세아탁구단 감독은 복싱을 시작한 후 감춰져 있던 자신감을 얻었다. 사진은 해설위원 시절의 모습. 정영식 제공
정영식 세아탁구단 감독은 복싱을 시작한 후 감춰져 있던 자신감을 얻었다. 사진은 해설위원 시절의 모습. 정영식 제공
이헌재 스포츠부장
이헌재 스포츠부장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단은 금 9, 은 3, 동메달 9개 등 총 21개의 메달을 합작했다. “할 수 있다” 신화를 만든 펜싱 박상영, 여자 양궁 2관왕에 오른 장혜진 등 여러 스타가 탄생했다. 그런데 메달리스트가 아닌데도 ‘국민적인 스타’가 된 선수가 있었다. 탁구의 정영식(34)이었다.

정영식은 탁구 남자 단식 16강전에서 당대의 일인자 마룽(중국)을 상대로 눈물겨운 투혼을 보였다. 첫 두 세트를 따내며 난공불락이던 만리장성을 넘을 뻔했다. 정영식의 기대 이상의 선전에 마룽은 진땀을 흘렸고, 중국 대표팀 감독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하지만 이후 듀스를 거듭하는 접전 끝에 결국 무릎을 꿇었다. 정영식은 패배 직후 펑펑 눈물을 쏟았다.

정영식은 남자 단체전에서도 선전했으나 독일과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패해 결국 올림픽 메달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고 독사처럼 달려드는 정영식의 모습은 진한 감동을 안겼고, 팬들은 그에게 ‘우리 영식이’란 별명을 붙여줬다.

정영식은 부지런한 선수였다. 성실함을 넘어 ‘탁구밖에 모르는 선수’라는 평가를 들었다. 어릴 때부터 유망주였던 그는 성인 무대에서도 착실히 성장했다. 중국과 일본, 폴란드 등 해외 리그에서도 뛰었다.

하지만 정작 정영식 본인은 행복하지 않았다고 했다. 선수 생활 내내 심각한 불안 장애에 시달렸던 그는 탁구채를 내려놓을 생각도 여러 번 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함께 땀 흘리는 동료들을 보며 참고 또 참았다. 2021년 도쿄 올림픽에도 출전한 그는 2023년 31세의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정영식은 “탁구를 칠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었기에 더 열심히 했던 것 같다”고 했다.

은퇴 후 미래에셋증권 탁구단 코치로 일하던 정영식은 2024년 9월 창단한 세아탁구단의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32세의 나이에 실업팀 감독이 될 수 있었던 건 많은 이들이 그의 탁구에 대한 열정과 사람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독’ 정영식은 요즘 행복하게 지낸다. 불안 증세도 사라졌다. 그는 “가르친 선수들의 실력이 느는 걸 볼 때마다 너무 재미있다”며 “휴가를 받아도 어서 빨리 체육관 가서 선수들을 보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했다.

달라진 환경 덕분이겠지만 또 하나의 계기가 있다. 바로 복싱이다. 정영식은 약 2년 전부터 복싱을 시작했다. 퇴근 후 저녁 늦게 체육관에 가 한 시간 반가량 땀을 흘린다. 정영식은 “기존의 내 성격이나 성향과는 전혀 다른 운동을 해보고 싶었다”며 “샌드백을 치고, 스파링을 하면서 마음속 두려움을 많이 극복했다”고 했다.

정영식은 내친김에 생활체육대회에도 두 번이나 출전했다. 현재 전적은 2전 2패다. 그는 경기 때 가르치는 제자들도 모두 불러 경기를 보게 했다. 정영식은 “탁구가 기술과 체력의 종목이라면 복싱은 기세와 깡다구의 스포츠다. 기세에 밀리면 주먹도 제대로 내지 못한다”며 “복싱을 통해 그동안 몰랐던 인생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됐다. (생활체육대회) 챔피언에 오르는 날까지 더 노력하겠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제자들도 배우는 게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헌재의 인생홈런#정영식 세아탁구단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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