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원호]대통령의 사과를 기다리며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2월 3일 23시 15분


계엄으로 40여년 한국의 성취 無化될 위기
재판 유불리 따지기보다 성찰적 태도 갖길
정치인에겐 더 무거운 역사의 법정 기다려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대통령에 의한 비상계엄이 선포된 이래 공동체로서 우리가 다 함께 겪었던 2개월이라는 시간은 한국 현대정치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시기였다. 당신의 정치적 입장이 무엇이고 어떤 일을 하건, 비상계엄의 소식을 들을 때 무엇을 하고 있었으며 얼마나 놀랐는지, 그리고 그 놀라운 소식을 어떤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그 이후에 무엇을 했는지는 수십 년이 지나서도 기억에 각인되고 후손에게 들려줄 이야깃거리로 남을 것이다.

비상계엄의 선포는 사실 시작일 따름이었다. 뒤이은 대통령 탄핵과 체포 및 구속, 서울서부지법 폭동, 그리고 최초의 현직 대통령 내란죄 기소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인 사건’들은 계속되고 있다. 더 두려운 사실은 지난 두 달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헤쳐나가기 힘든 갈등으로 점철될 시간들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헌정질서의 위기’라는 말이 이토록 총체적으로 현실이 된 적이 없었다.

이 위기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지난 40여 년 대한민국의 성취를 한순간에 무화(無化)시킬 수 있는 위기이기도 하다. 짧은 시간에 경제적 근대화와 정치적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었던 대한민국의 성취가 불과 두 달 사이에 신기루같이 눈앞에서 사라질 수도 있음을 우리는 실감하고 있다. 계엄포고령의 두어 줄로 지난 40년 동안 피와 땀의 대가로 얻어낸 시민적 자유가 어느 날 갑자기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훼손됐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불확실성은 국가 경제를 한순간에 가라앉힐 수 있는 직격탄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처절하게 실감하고 있다. 덧붙여, 법치주의 제1원칙인 사적 자력구제 금지의 원칙이 법원 폭동 앞에서 휴지조각이 되는 것도 목도했다. 민주주의, 근대경제, 근대법치가 한꺼번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은 계엄을 선포하면서, 혹은 지지자들에게 손편지를 띄우면서 이런 피해를 예측했을까? 우습게도 그가 법정에 선 현 상황에서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법은 의도한 범법과 의도하지 않은 행위를 구분해 처벌하고 있으며, ‘합리적인 인간이 예측할 수 없었던’ 피해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는다. 법률가 대통령은 자신이 계엄령을 낸 의도가 다른 것이었으며, 이런 피해는 예측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양형에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진짜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대통령은 왜 사과하지 않는가? 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가? 하루하루 견디며 살아가기 어려운 국민들의 삶에 평지풍파를 일으켜 놓고, 그것에 대한 진심 어린 성찰도, 솔직한 사과도 왜 하지 않는가?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3일 계엄 선포 직후 1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한 이래, 1월 15일 체포 직전까지 6차례에 걸쳐 대국민담화의 명목으로 카메라 앞에 섰고, 특히 체포 직전에는 6780자 길이의 대국민서신을 남기기까지 했으며, 이후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영상을 통해 숱한 말을 남기고 있다. 그 모든 대통령의 말과 글에서 사과 비슷한 발언은 딱 2번 발견된다. 그 내용은 “짧은 시간이지만… 놀라고 불안하셨을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사과”(지난해 12월 12일 제4차 담화)하는 정도의 수준을 지나지 않는다.

법률가 대통령이 사과하지 않는 이유는 명백하다. 사과는 잘못의 인정이며, 법정에서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계엄 선포의 의도를 정당화하는 것이 탄핵심판과 내란죄 재판의 가장 중요한 전략일 것이다. 그리고 그 정당화를 위해 야당과 중국과 선거관리위원회와 정부 예산 삭감 등 필요한 모든 말들이 동원될 것이다. 나라가 찢어져서 시민들이 내전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탄핵심판을 다룰 헌법재판과 내란죄를 다룰 형사재판을 넘어서는 제3의 법정, 혹은 역사의 법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모든 정치 지도자들이 자신들이 후세에 무엇을 남기고 어떻게 평가받는지를 가장 두렵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정치인에게는 현행법의 법정보다 더 무거운 역사의 법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법률가 대통령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재판에서 유리한 판결을 받을 수도 있겠고, 일시적으로 여론이 우호적으로 바뀔 수도 있겠다. 그러나 대한민국 미래의 존속과 번영이라는 긴 호흡에서 본다면 결국 남게 되는 것은 정치인과 정파의 유불리가 아니라 후대의 평가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대통령의 진심 어린 사과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잘못 생각했다는 한마디, 모든 것이 내 책임이라는 한마디, ‘The buck stops here’라는 한마디를 우리는 들을 수 없는 것일까. 지지자들만의 대통령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대통령으로서, 정치라는 어려운 과업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는 솔직한 성찰을 들을 수는 없는 것일까. 다시는 이런 불행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는 말을 들을 수는 없는 것일까.

#비상계엄#대통령 탄핵#정치적 민주화#헌정질서#시민적 자유#법치주의#사과의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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