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 풍경[이준식의 한시 한 수]〈258〉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4월 4일 23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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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장안성 도처에 흩날리는 꽃, 한식날 봄바람에 일렁이는 황궁의 버들.
저물녘 궁전에서 촛불을 건네주니, 가벼운 연기 고관대작 집안으로 흩어져 들어가네.
(春城無處不飛花, 寒食東風御柳斜. 暮漢宮傳蠟燭, 輕煙散入五侯家.)

―‘한식(寒食)’·한굉(韓翃·생졸 미상·당 중엽)

시는 한식날 장안의 한가로운 풍경을 스케치한다. 봄바람에 성 안 가득 꽃잎이 날리고 궁전에는 버들이 나부낀다. 온종일 불을 지피지 않고 찬 음식만 먹도록 한 한식날의 금령(禁令)이 해제되는 일몰 시간에 맞추어 황제는 측근 대신들에게 이제 불을 써도 좋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게 바로 촛불, 시인의 눈에는 황제의 은총처럼 옅은 연기가 저들의 저택으로 스미는 장면이 인상 깊게 비쳤나 보다. 말투는 무덤덤하고 소박하지만, 이런 궁중 의례가 퍽 색다르고 고상하게 보였기에 이 순간을 담아두려 하지 않았을까.

전혀 다른 해석도 있다. 황제가 한식날 금령을 어긴 채 몇몇 세도가들에만 특혜를 베풀고 있음을 풍자했다는 것이다. 그 실마리는 시의 원문에서 찾을 수 있다. 번역에서는 ‘저물녘 궁전에서 고관대작에게 촛불을 건네준다’고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저물녘 한나라 궁전에서 오후(五侯)에게 촛불을 건네준다’가 정확하다. ‘오후’는 후한(後漢) 시기 환제(桓帝)에 의해 제후로 봉해진 다섯 환관. 황제를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인물의 대명사처럼 쓰이곤 한다. 시인이 황실의 비리를 대놓고 비판할 수 없었기에 부득이 한대의 사례를 빌려 우회적으로 비꼬았다는 해석이다. 이러나저러나 당시 덕종(德宗)은 이 시를 좋아하여 오랜 기간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시인을 중용했다고 하니 굳이 풍자시로 읽을 필요는 없을 듯.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한식 풍경#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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