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발니 죽음에도 ‘푸틴 지지율 80%’… “실제 민심과는 차이”[인사이드&인사이트]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2월 20일 23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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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선 앞둔 ‘현대판 차르’ 푸틴

《러시아가 다음 달 15∼17일 대선을 치른다. 2000년부터 집권 중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72)이 또 한 번 압도적 득표율로 5선에 성공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어서 선거 자체는 일종의 요식 행위로 꼽힌다.

그가 이번 선거에서 승리하면 6년 임기의 연임을 허용하는 헌법에 따라 사실상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의 집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 1922∼1952년 30년간 옛 소련을 철권통치한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을 넘어 현대 러시아 지도자 중 최장수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현대판 차르(제정 러시아 황제)’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푸틴 대통령이 당장 실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유는 넘쳐난다. 24일로 발발 2주년을 맞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피로감, 16일 시베리아 감옥에서 의문사한 정적(政敵) 알렉세이 나발니를 비롯해 그의 통치 기간 중 사라진 수많은 사람들, 장기집권과 권위주의 통치 방식에 대한 러시아 안팎의 비판 등 끝도 없다.

그런데도 그의 지지율은 우크라이나 침공 후 줄곧 80%대를 웃돌고 있다. 왜 그럴까. 러시아 국민에게는 소련 해체 후 각종 사회 혼란으로 이류 국가로 전락할 위기에서 ‘위대한 러시아’의 자부심을 되살린 지도자로 인식되고 있고, 전쟁 와중에도 고유가 등에 힘입어 경제가 계속 선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지난해 러시아의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3.6%로, 미국(2.5%)을 비롯한 주요 7개국(G7)의 성장률을 모두 앞섰다.

●이류 국가 위기에서 러시아 재건


소련 시절 정보기관인 KGB에서 근무했던 푸틴은 47세였던 1999년 8월 총리에 올랐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소련 해체 후 친서방 노선을 편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알코올의존자(알코올중독자)였고 각종 건강 이상에 시달려 나라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러시아는 1998년 국가 부도를 맞았고 마피아 등의 범죄가 만연했으며 체첸 등 소수민족 테러도 기승을 부렸다. 이 와중에 떼돈을 번 신흥 재벌 ‘올리가르히’는 향락을 즐겨 서민 공분을 샀다.

소련이 무너지면 서유럽처럼 풍요로운 생활이 보장될 줄 알았던 국민들은 분노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평생직장과 무상의료·교육이 보장됐던 소련 시절이 낫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당시 러시아는 청소년 자살률이 미국의 2배가 넘을 정도로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회였다. 이때의 악몽으로 아직도 러시아에서는 ‘서방’ ‘민주주의’ 등을 혼란, 부패, 가난의 동의어로 인식하는 이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신임 총리 푸틴은 취임 직후 극동 하바롭스크를 찾아 “러시아가 이류 국가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다”며 자신이 이를 바꾸겠다고 외쳤다. ‘강력한 러시아 재건’을 주창한 그는 임기를 6개월 남긴 옐친의 조기 사임으로 2000년 3월 치른 대선에서 득표율 53.4%로 당선됐다. 이후 인권 탄압 논란 속에 체첸 테러 등을 진압했고 주요 올리가르히를 줄줄이 숙청했다. 마피아 범죄도 처벌했다.

이를 통해 그의 집권 1, 2기(2000∼2008년)에 국민 생활은 크게 개선됐다. 집권 첫해인 2000년 1772달러(약 239만 원)에 불과했던 1인당 GDP는 2008년 1만1635달러로 7배 가까이로 뛰었다. 이 시기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7%대로 러시아 역사상 가장 가파르게 성장했다. 특히 고유가 상황이 세계 2위 석유 수출국인 러시아에 호재로 작용했다.

2022년 러시아의 1인당 GDP는 1만5271달러(약 2062만 원)로 2008년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푸틴 대통령이 집권 초기의 ‘과실’로 오랜 정치적 효과를 누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990년대∼2000년대 모스크바에서 유학한 박정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러시아유라시아팀 선임연구위원은 “많은 러시아 유권자들이 아직도 20년 전의 경제 호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국민 대다수에게 푸틴은 ‘희망을 준 대통령’이라는 이미지가 여전히 강력하다”고 설명했다.

●전쟁의 ‘돈줄’ 된 에너지 산업


세수(稅收)의 약 30%가 에너지 산업에서 나올 정도로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경제 구조는 결과적으로 푸틴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전쟁의 판세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서방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러시아에 각종 경제 제재를 가했지만 구멍이 숭숭 뚫린 ‘무늬만 제재’라는 비판이 적지 않다.

G7, 유럽연합(EU), 호주 등은 배럴당 60달러 이상 러시아산 원유의 수입을 제한했다. 그러나 지난해 7월 이후 러시아산 우랄유 가격은 줄곧 배럴당 60달러를 넘고 있다. 설사 우랄유가 60달러를 넘어도 서방 주요국이 많이 쓰는 북해산 브렌트유(배럴당 80달러 선)보다 훨씬 싸기 때문에 인도 등이 러시아산 원유를 앞다퉈 사들이고 있다.

러시아가 수출 대상을 서방 주요국에서 중국, 인도 등으로 바꾼 것도 제재를 무력화하는 데 효과를 내고 있다. 특히 미국과 패권 갈등을 벌이고 있는 중국은 현재 러시아산 원유의 최대 수입국으로 알려져 있다. 알렉산드르 노바크 러시아 부총리 겸 에너지장관 또한 최근 국영 로시야24 방송에 “지난해 석유 수출의 90%가 중국과 인도로 갔다. 유럽 비중은 4∼5%에 불과하다”고 자랑했다.

에너지로 번 돈은 결국 전쟁 자금으로 쓰인다. 에너지 부문 세수는 우크라이나 전쟁 직전인 2021년 9조570억 루블(약 131조548억 원)이었고 지난해에도 8조8220억 루블로 큰 차이가 없다. 러시아의 관점으로만 보면 전쟁이 방산 산업의 호황 및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측면도 상당히 크다. 러시아의 올해 국방예산은 10조4000억 루블(약 151조 원)로 전체 예산의 28.4%를 차지한다. GDP 대비 국방비 비중 또한 전쟁 전인 2021년 약 4%에서 올해 약 6%로 늘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러시아가 서방의 경제 제재를 우회하고 방산 산업을 활성화해 침체를 피하는 데 성공했다고 분석했다.

실제 전쟁 첫해인 2022년 1.2% 역성장했던 러시아는 지난해 3.6% 성장했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러시아의 성장률 전망치를 2.6%로 지난해 10월 전망치보다 1.5%포인트 상향했다. 강윤희 국민대 유라시아학과 교수는 “전쟁 초기 서방은 국가 부도를 예견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며 전쟁이 국민 생활과 산업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제한한 것이 그가 유권자로부터 지지를 받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소련 시절 ‘부엌 민주주의’로 회귀”


러시아 내부의 강한 지지세에도 불구하고 거듭된 반대파 숙청과 여론 통제로 상징되는 그의 권위주의 통치가 영원히 계속될 수 없다는 지적도 상당하다. 현재 러시아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우크라이나 국기 색인 파란색과 노란색이 섞인 풍선을 들었다는 이유로 평범한 시민이 재판에 넘겨지는 일이 다반사다.

푸틴 정권은 개전 2개월 만인 2022년 4월 ‘군 모독죄’를 신설해 사실상 모든 반전 여론을 틀어막고 있다. 관련 혐의로 법 시행 첫해에만 2만467명이 체포됐고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이 감옥에 갇히거나 기소된다.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출신인 안드레이 콜레스티코프 미국 싱크탱크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선임 연구위원은 미 외교매체 포린어페어스(FA) 기고에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서는 오직 가까운 사람들하고만 비밀스럽게 속삭이는 분위기다. 소련 시절의 ‘부엌 민주주의’로 회귀했다”고 한탄했다.

러시아를 떠나는 사람도 속출하고 있다. 현지 싱크탱크 ‘리러시아’에 따르면 개전 후 지난해 7월까지 18개월간 미국, 유럽, 중앙아시아 등으로 간 러시아인 수는 최대 92만 명으로 추산된다. 대부분 전쟁에 반대하거나 징집을 피해 떠났다.

박노벽 전 주러시아 한국대사(재임 기간 2015∼2017년)는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이 80%대라고 해서 약 1억4000만 국민의 80%가 모두 그를 강하게 지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전쟁을 묵인하는 수준의 미온적 지지를 보내는 국민도 많을 것”이라고 했다. 소련 시절부터 현 체제에 순응하지 않을 때의 불이익이 지나치게 커 반대 의사를 드러내지 못하는 국민이 많다는 얘기다.


이지윤 기자 asap@donga.com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러시아#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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