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 정신-역사관 혼란 부른 軍 정신전력 강화 교재[손효주 기자의 국방이야기]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1일 23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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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가 2019년 3월 이후 약 5년 만인 지난해 말 발간한 정신전력교육 기본 교재 표지. 국방부 제공
국방부가 2019년 3월 이후 약 5년 만인 지난해 말 발간한 정신전력교육 기본 교재 표지. 국방부 제공
손효주 기자
손효주 기자
“국방부는 장병들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명확한 대적관, 전투 현장 중심의 군인정신을 함양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굳건히 수호해 나갈 것이다.”

지난해 12월 26일 국방부가 장병 정신교육에 활용되는 ‘정신전력교육 기본교재’가 발간된 사실을 알리며 발표한 입장이다. 이 교재는 국방부가 문재인 정부 당시인 2019년 3월 이후 약 5년 만에 개편해 발간한 것인데 내용 중 “북한 추종 세력은 내부 위협 세력”이라고 규정한 부분이 발간 직후 일각에서 논란이 됐다. “진보 진영을 싸잡아 종북 세력 취급했다”는 주장이 나온 것. 국방부는 “무비판적인 종북 세력을 말하는 것이지 건전한 진보 진영을 언급한 것은 아니다”라며 이 같은 입장을 밝혔다. 교재 도입부의 국방부 장관 발간사를 통해선 우리 군이 무엇을 지킬 것인지를 장병들이 명확히 인식할 수 있도록 하고 올바른 역사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재 발간 목적 중 하나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는 곧 ‘자승자박형’ 해명이자 발간사가 됐다. 올바른 역사관과 대한민국 수호 의지를 의심케 하는 문구가 뒤늦게 발견된 것. 교재에 독도 문제를 ‘영토 분쟁’으로 기술해 놓은 부분이 문제가 됐다. 이에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영토 분쟁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데 어느 나라 국방부가 만든 교재냐. 일본 방위성이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독도를 일본 영토로 기술한 방위백서가 발간될 때마다 주한 일본 무관을 불러들여 항의해 온 한국 국방부를 지켜본 일본 정부 입장에서도 어리둥절해할 만한 문구였다.

국방부는 논란이 확산되자 지난해 12월 28일 오전 “(문제가 된) 문장의 주어는 (일본 등) 주변 국가이지 우리가 아니다”라는 해명을 내놨다. 일본이 영토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기존 사실을 언급한 것이라는 해명이었다.

논란의 문장을 뜯어보면 이런 해명은 다소 궁색하긴 해도 궤변 수준은 아니다. 문장을 보면 영토 분쟁으로 규정한 주어를 일본으로 해석할 여지는 있다.

“한반도 주변은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여러 강국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군사력을 해외로 투사하거나,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 쿠릴열도, 독도문제 등 영토분쟁도 진행 중에 있어 언제든지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국방부 해명처럼 일본 정부 주장을 옮겨 놓았다고 해서 면피가 되는 건 아니다. 일본 주장을 ‘정신전력 교육을 위한 최상위 교재’라는 위상을 가진 이 교재에 그대로 복기한 것 자체가 일본 주장을 확산시키는 데 일조할 수 있기 때문. 또 일본의 ‘국제 분쟁화 전략’에 말려드는 격이 될 수도 있다.

2019년 당시 같은 이름의 교재 발간에 관여한 한 관계자는 “주어가 일본이면 언급할 가치도 없는 주장을 써도 되는 것이냐”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전 정부 교재처럼 독도는 우리 영토라는 점만 명시하면 되는데 직전 교재와의 차별화에 몰두한 나머지 독도와 관련한 불필요한 문장을 새로 넣다가 이런 사고가 난 것”이라고 꼬집었다.

국방부는 이 교재 서문에 교재 발간 목적으로 “장병들이 무엇을, 누구로부터, 어떤 자세로 지킬 것인지에 대해 강한 신념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여러 번 뜯어봐야 독도를 영토 분쟁화하는 주어가 일본임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애매모호한 데다 ‘영토 분쟁’으로 규정한 주체를 우리 국방부로 해석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열린 문장’으로 장병들에게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강한 신념을 갖게 할 수 있을까. 한 예비역 대장은 “장병 정신전력 교육에 쓰일 교재 문장은 무엇보다 직관적이어야 한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문장이 있어선 안 된다. 문해력 테스트 교재가 아니지 않나”라고 지적했다.

그나마 이번 사태에서 다행인 건 윤석열 대통령의 질타가 있긴 했지만 국방부가 모처럼 빠르게 실수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주어 혼동’ 해명도 사실상 거둬들였고 공식 사과도 군사작전처럼 신속하게 진행했다. “전임 장관 시절 집필된 것”이라며 구차한 모습을 보이거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채 ‘주어 혼동’ 프레임으로 공방을 끌어갔다면 사안은 홍범도 장군 흉상 사태처럼 장기간 이어지며 국방력 허비만 불러올 수 있었다. 다행히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사과하며 빠른 사태 진화에 나섰다.

이제 남은 건 국방부가 사과 즉시 착수한 감사를 통해 집필 및 감수 등 발간까지 전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밝혀내고 이를 공개해 사태 재발을 막는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해 말 “남조선 전 영토 평정” 등 대남 협박 발언을 쏟아내며 노골적으로 중대 도발 가능성을 시사했다. 국방부는 ‘정신전력 교재 사태’를 빨리 매듭짓고 북한 위협 대응에 국방력을 집중해야 한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장병 정신#역사관 혼란#정신전력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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