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 불이 들어오지 않을 때[공간의 재발견/정성갑]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12일 23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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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였을까? ‘해외 출장이나 여행을 떠난 길에 엄마의 부고가 들려오면 어쩌지?’ 하는 근심이 머릿속에서 돌연 부풀어 오를 때가 있다. 엄마 나이 42세에 태어난 늦둥이가 벌써 48세가 됐으니 엄마 나이도 벌써 아흔이다. 60대로, 70대로, 80대로 계속 머무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워낙에 바지런하고 운동에도 열심이신 분이라 엄마의 끝은 오랫동안 실감의 영역이 아니었다.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
올해, 엄마는 눈에 띄게 쇠약해졌다. 주름이 많지 않은 얼굴이었는데 여느 할머니와 비슷한 굴곡의 얼굴이 되었다. 종아리가 더 얇아졌고 머리숱도 눈에 띄게 줄었다. 말에 힘이 없고 발음이 뭉개져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런 엄마가 추석 연휴에 보행기 좀 알아봐 달라고 했다. 이제 잘 못 걷겠다는 말이 맥없이 따라붙었다.

검색창에 어르신 보행기라고 치니 수십 종의 모델이 득달같이 쏟아져 나왔다. 적당한 것으로 주문을 했고 며칠 전 도착한 보행기를 오늘 아침 엄마에게 갖다 드렸다. 몇 번에 걸쳐 핸들 높이를 조정한 보행기를 이리저리 끌어본 엄마가 말했다. 쓰겄다, 고맙다. 형과 누나들에게 인증샷을 보내기 위해 보행기 시트에 앉은 엄마를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었다. 눈에 띄게 늙어버린 노모가 그 안에 있었다. 사진만 봤다 하면 엄지와 검지를 벌려 확대하는 버릇이 있는 나인데 그러지 않았다. 엄마 집을 나와 며칠을 보내는 동안 엄마와 함께 찍은 어릴 적 사진 한 장이 뿌연 이미지로 자주 떠올랐다. 하굣길에 마중 나온 엄마 곁에 찰싹 붙어 신나게 걷고 있는 모습. 나는 어렸고 엄마는 젊었다. 엄마는 종종 말한다. “인제 다 됐지 뭐….”

같은 시기, 우리 집에는 장모님이 올라오셨다. 장모님 역시 몸이 편찮으셔서 추석 연휴의 시작과 함께 아내가 집으로 모시고 왔다. 하루는 걷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장모님을 모시고 인왕산 산책로에 올랐다. 완연한 가을밤이었다. 쏴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소슬했다. 산책로는 활기가 넘쳤다. 저 아래쪽으로 보이는, 마을버스의 움직임조차 정겹고 따뜻했다. 지나가는 자전거, 배드민턴 치는 사람들을 보며 장모님이 말했다. “행복하게 얘기하면서 건강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 보면 제일 부러워.” 그 순간, 장모님의 몸과 영혼에는 불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나이가 들면서 누군가의 세계는 점점 작아진다. 갈 수 없고 볼 수 없는 곳도 많아진다. 누리고 경험한 수많은 공간에 더 이상 빛이 들어오지 않는 세월. 살면서 누구나 겪는 그 점멸의 시간이 길지 않기를,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



#부고#실감의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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