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누가 ‘귀신 잡는 해병대’의 신뢰를 떨어뜨리는가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8월 30일 23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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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사령관 “안보실 2차장과 통화”
대통령실은 일제히 수사외압설 부인
이 땅의 여자들은 군인이 애인이다
대통령의 사람 보는 눈은 철통같은가

대한민국 해병대 홈페이지 갈무리
‘당신들은 모르실 거예요/이 땅에 태어난 여자들은/누구나 한때 군인을 애인으로 갖는답니다’. 시인 문정희는 ‘군인을 위한 노래’에서 이렇게 썼다. 소녀 때는 군인에게 위문편지를 쓰고 처녀 때는 군대로 면회를 가고 어느 중년의 오후 군복 벗은 그를 우연히 만나 속으로 조금 울기도 한다고 했다. 하지만 “아들, 아들” 하면서 아들을 애인처럼 여기는 군화모(군인 아들을 둔 부모님 카페) 회원들은 요즘 아들이 무탈하게 제대할 수 있을지 끌탕을 한다.

7월 19일 경북 예천군 석관천에서 집중호우 실종자 수색을 하던 스무 살짜리 채모 상병이 흙탕물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육중한 장갑차도 5분을 못 버티고 철수하는 급물살 속을 ‘귀신 잡는 해병대’는 구명조끼도 없이 명령에 따라 허리 높이까지 들어갔다가 순식간에 변을 당했다.

세상에 귀중하지 않은 생명이 어디 있으랴마는 그는 부모님이 결혼 10년 만에 시험관 시술로 어렵게 얻은 외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을 해병대 배치 두 달 만에 떠나보냈음에도 유족들은 “이번 사고를 계기로 아들이 사랑했던 해병에서 철저한 원인 규명을 통해 다시는 이런 비통한 일이 생기지 않게 해달라”며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윤석열 대통령도 “정부는 사고 원인을 철저히 조사해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과연 믿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2일 박정훈 당시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이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 등 8명에 대해 업무상 과실치사 등을 적시해 경찰에 이첩했지만 국방부는 곡절 끝에 해병대 수사를 뒤엎고 대대장 2명만 과실치사 혐의로 경찰에 넘겼다.

박 대령은 국방부와 국가안보실 외압을 주장하며 “해병대는 정의와 정직을 목숨처럼 생각한다”고 해병대 정신을 강조했다. 그런 박 대령에 대해 30일 국방부 검찰단은 ‘항명’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제 군화모들은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럽다. 해병대가 어떤 군대인가.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 군대와 거리가 먼 나도 배우 현빈이 나이 30에 자원입대했던 해병대는 안다. 국가전략기동부대로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의 선봉에 섰듯, 가장 위험한 곳에서 찬란한 해병 정신을 발휘해 국민에게 신뢰받는 충성스러운 군대다.

그 해병대의 신뢰를 누군가 깨뜨리고 있다. “지라시를 보니 관련 내용을 보고받은 대통령이 ‘이런 일로 사단장을 처벌하면 누가 사단장을 하겠느냐’고 했다고 그러더라.” 16일 국회에서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 발언은 27일 MBC ‘스트레이트’, 29일 공개된 국방부 검찰단 제출 박 대령의 진술서 핵심과 거의 일치한다.

물론 30일 국회에서 대통령실과 국방부 관계자들은 일제히 외압설을 부인했다. 그러나 25일 국회에 출석한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은 “안보실 2차장이 상황 파악을 위해 저에게 전화를 해서 관련 경과에 대해 잠시 말씀드렸다”고 이미 확인한 바 있다.

그가 위증한 것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무소불위 대통령실이라 해도 수사 관여는 위법이다. 성일종 국민의힘 의원도 9일 방송 인터뷰에서 “안보실은 수사 개입을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다. 수사 기록을 요구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과연 밝혀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로써 이번 일은 채 상병 사망 원인 규명을 넘어 국방부와 대통령실까지 연루된 수사 개입과 외압, 심지어 국회 위증 및 대(對)국민 기만 사태로 본질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채 상병의 순직은 매우 불행하고 가슴 아픈 일이다. 구명조끼만 입었다면 희생되지 않았을 수 있었기에 더욱 안타까운 일이었다. 군 관계자들 사이에선 사고사로 인해 사단장까지 업무상 과실치사로 단죄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시각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우리는 알고 싶지 않은 것을 너무 많이 알게 됐다.

휘하 사병들의 안전과 생명보다 윗분과 홍보에 신경 쓰는 지휘관들도 있었다. 확신도 없이 결재하는 국방부 장관의 무능함도 드러났다. 이래서야 대통령이 암만 한미동맹에 한미일 안보협력을 굳건히 한들 군인들이 지휘관을 따를지, 그리하여 국방이 철통같아질지 걱정스럽다. 군화모들이 정부를 못 믿고 아들에게 “제발 네 한 몸만 챙기라”고 통사정하는 판이어서다.

무엇보다 정무기능, 법무기능이 마비된 가운데 대통령 앞에서 “그건 아닙니다” 말 못 하는 대통령실 정황이 더해간다는 게 겁나고 두렵다. 방향은 맞을지 몰라도 다른 의견을 말할 수 없다면, 이 나라는 자유로운 게 아닌 것이다.


김순덕 대기자 yuri@donga.com
#귀신 잡는 해병대#집중호우 실종자 수색#수사외압설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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