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온난화 직격탄… 말미잘 산호 뒤덮고, 흰개미 대웅전 갉아[인사이드&인사이트]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13일 23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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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 비상 걸린 문화재

《#1. 경기 연천군 은대리의 작은 연못에는 천연기념물 물거미가 산다. 국내에서 물거미 서식이 확인된 곳은 은대리뿐이다. 한데 2015년 가뭄으로 이 물거미 서식지가 말라붙는 일이 벌어졌다. 가뭄이 더욱 잦아진다면 물거미의 생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2. 충무공 이순신의 전공을 기념하는 국보 ‘경남 통영 세병관’의 기둥 양 옆에 끼워진 나무는 흰개미 떼가 갉아먹었다. 2021년 3월 국립문화재연구원이 세병관의 피해 실태를 파악한 결과 흰개미 떼가 목재의 겉과 속을 파먹어 목재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이소연 문화부 기자
이소연 문화부 기자
기후변화가 심각해지면서 문화재도 직격탄을 맞고 있다. 기온, 해수 온도 상승으로 문화재에 피해를 주는 생물의 활동이 늘고 가뭄 등 기상이변으로 인한 피해도 커지고 있다. 문화재청은 기후변화를 위협 요인으로 인식하고 대응에 나섰다. 올해 7월 ‘기후변화 대응 종합계획 수립 TF’를 조직해 향후 5년간 피해를 예측하고, 피해 상황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계획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 제주연안 연산호 군락, 해인사 전나무…사라지는 천연기념물

제주 서귀포 앞바다의 천연기념물 '제주연안 연산호 군락'(위 사진). 물결에 따라 부드럽게 흔들려 '연산호'란 이름이 붙었다. 최근에는 난대성 해양생물인 담홍말미잘로 뒤덮이며 고사 위기에 놓였다(아래 사진).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제공
제주 서귀포 앞바다의 천연기념물 '제주연안 연산호 군락'(위 사진). 물결에 따라 부드럽게 흔들려 '연산호'란 이름이 붙었다. 최근에는 난대성 해양생물인 담홍말미잘로 뒤덮이며 고사 위기에 놓였다(아래 사진).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제공
기후변화로 인해 천연기념물 등 자연유산의 피해가 심각하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에 따르면 2014년까지만 해도 세계 자연유산의 첫 번째 위협 요인으로 꼽힌 건 ‘침입 외래종 유입’이었다. 그러나 2017년 조사부터는 기후변화가 1순위 위협 요인이 됐다.

국내에선 ‘제주 바다의 꽃’으로 불리는 천연기념물 ‘제주연안 연산호 군락’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2021년 제주도 세계유산본부가 발표한 ‘제주연안 연산호 군락 내 유해 해양생물 제거 및 서식환경 개선사업’ 보고서에 따르면 난대성 해양생물 지표종인 담홍말미잘과 보키반타이끼벌레 등 유해 해양생물이 연산호 군락을 서서히 뒤덮어 고사 위기에 놓였다.

전문가들은 해수 온도 상승을 원인으로 꼽는다. 국립해양조사원에 따르면 인근 가파도의 8월 평균 수온은 2018년 24.9도에서 지난해 28.1도로 4년 만에 3.2도나 올랐다. 이원호 문화재청 천연기념물과 학예연구관은 “해수 온도가 올라가면서 연산호 군락을 갉아먹는 난대성 해양생물이 제주 연안 생태계의 우세종이 됐다”고 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老巨樹) 179그루는 평년값을 크게 벗어난 극한기온 현상이나 자연재해에 취약하다. 기후변화로 잦아진 태풍도 노거수를 위협하고 있다. 수령이 250년이 넘은 경북 합천 ‘해인사 전나무’는 2019년 태풍 링링으로 완전히 부러졌다. 이 나무는 9세기 통일신라시대 학자 최치원이 해인사를 지나다 꽂은 지팡이가 자라났다는 전설이 깃든 나무의 후계목이다. 문화재청은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해인사 전나무 등 천연기념물 노거수 2그루가 태풍 피해로 부러져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됐다”고 밝혔다.

● 해인사 장경판전, 통도사 대웅전 흰개미로 몸살

목조건축 문화재는 기후변화에 특히 취약하다. 목재를 갉아먹는 흰개미 탓이다. 국보인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과 양산 통도사 대웅전, 통영 세병관은 모두 흰개미 떼의 피해를 입었다. 13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지난해 흰개미 피해로 방제를 실시한 국가지정 목조문화재는 조사 대상 78건 중 17건으로 피해율이 21.8%나 됐다.

올해 3월 문화재방재학회지에 등재된 ‘우리나라 기온 변화에 따른 흰개미 활성 변화 연구’ 논문에 따르면 지난 100년(1920∼2019년) 동안 한반도 기후변화로 흰개미가 활동하는 기간과 범위가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흰개미 분포 범위는 한 해 중 가장 추운 달의 평균 기온에 따라 결정되는데, 최근 30년(1990∼2019년)의 1월 연평균 기온은 첫 30년(1920∼1949년)보다 2.1도가 올랐다. 같은 기간 흰개미의 연평균 활동 일수는 212일에서 228일로 16일 늘었다. 흰개미 활동량이 늘면서 개체 하나가 연간 먹어치우는 목재의 양도 같은 기간 6.958mg에서 8.107mg으로 12.7% 증가했다. 김시현 국립문화재연구원 안전방재연구실 학예연구사는 “우리나라 기후가 점차 온난화되면서 흰개미 번식으로 인한 피해 위험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 흰개미 미리 탐지하는 시스템 개발

관련 기관들은 기후변화로 인한 문화재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나섰다. 한국전통문화대 문화재예방보존연구소는 2021년부터 ‘사물인터넷 기반 흰개미 원격감시 통합 모니터링 시스템’을 개발 중이다. 이 시스템은 기존 흰개미 탐지 체계의 한계를 보완하는 기술로 꼽힌다.

문화재청에서는 2007년부터 인간보다 100만 배 뛰어난 후각을 지닌 흰개미 탐지견을 동원해 목조문화재에 침입한 흰개미를 탐지하고 방제해왔다. 그러나 탐지견을 통한 점검에는 한계가 있어 선제적 대응보다는 이미 흰개미 피해를 입은 목조문화재를 방제하기 위한 후속 조치에 가까웠다.

정용재 한국전통문화대 문화재예방보존연구소장이 개발 중인 새 시스템은 사전 예측을 할 수 있게 한 것이 핵심이다. 목조문화재에서 약 2m 떨어진 땅속 얕은 곳에 원격 통신이 가능한 ‘흰개미 탐지 디바이스’를 설치한다. 흰개미 떼를 유인하기 위해 기기 내부에는 이산화탄소를 분사한다. 30cm 길이의 기기 아래쪽 끝에는 4cm 길이 셀룰로오스 성분의 종이가 숨어 있다. 셀룰로오스는 나무 성분 중 흰개미가 가장 좋아하는 물질이다. 흰개미 떼가 좋아하는 환경으로 유인한 뒤 흰개미들이 기기 하단의 종이를 긁어먹으면 자동 경보 센서가 작동해 ‘목조문화재 흰개미 모니터링 시스템’에 전달된다. 정 소장은 “2025년 시범 운영을 목표로 현재 충남 부여군 한국전통문화대 내 산지 3곳에 탐지 기기를 설치해 시험하고 있다”고 했다.

● 지역공동체, ‘자연유산 지킴이’로 나서

기술보다는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일도 적지 않다. 문화재청과 제주도 세계유산본부는 올해 3월 ‘제주연안 연산호 군락’을 위협하는 유해 해양생물을 지역 주민과 함께 제거하기로 했다. 제주연안 연산호 군락이 서식하는 문섬과 범섬, 섶섬에 입도하는 낚시 어선 35척의 선주와 스쿠버 업체 120곳을 운영하는 전문 다이버를 ‘자연유산 지킴이’로 임명한 것. 전문 다이버들은 연산호 군락을 고사시키는 유해생물을 제거하고, 선주들은 선박 내 40L 쓰레기종량제 봉투를 두고 수시로 섬 주변 쓰레기를 치운다. 주민들은 “제주연안 연산호 군락이 고사하면 우리도 살길이 없어진다”며 적극 나서고 있다.

노거수 역시 인근 주민의 보살핌이 필수적이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3월부터 천연기념물 노거수 179그루를 가까이서 돌보는 지역 주민을 선정하고 있다. 현재까지 노거수 지킴이로 선정된 지역민 82명은 산불이나 수해 등 자연재해 때 수시로 노거수를 살피며 문화재청에 위기 상황을 알리고 있다.

이 같은 노력 덕분일까. 2017년부터 봄에도 싹을 틔우지 못하며 말라죽을 뻔했던 천연기념물 ‘강릉 오죽헌 율곡매’가 올 3월 14일 분홍색 매화꽃을 활짝 피웠다. 이원호 연구관은 “율곡매는 기온 상승과 일조량 증가 등으로 고사 위기에 놓였지만, 지역민과 지자체가 나무 주변에 차양막을 설치해 일조량을 조절하며 노력한 결과 다시 꽃을 피우게 됐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기후변화에 취약한 천연기념물을 지역 공동체와 함께 지켜나가는 ‘자연유산 지킴이’ 제도를 확장해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소연 문화부 기자 always99@donga.com


#문화재#온난화 직격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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