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한규섭]한국에만 있는 영문 복합어, ‘폴리널리스트’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12일 23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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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출신 정치인 뜻하는 ‘폴리널리스트’
미국선 소수지만 한국선 전체의원 8% 차지
감시자 역할하다 정치 입문, 이해충돌 가능성

한규섭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한규섭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폴리널리스트(polinalist)’, 영어로 ‘정치’를 일컫는 ‘폴리틱스(politics)’와 ‘언론인’을 뜻하는 ‘저널리스트(journalist)’의 복합어다. 정치 참여 전직 언론인을 칭하는 말이다. 교수 출신 정치인을 칭하는 ‘폴리페서(polifessor)’와 비슷한 조합이다. 둘 다 부정적 사회적 시각이 반영된 복합어들이다.

그러나 구글에서 ‘폴리널리스트’를 검색하면 영어 문서에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 단어다. 챗GPT도 “뭔지 모르겠다”고 답한다. (사실 ‘폴리페서’라는 단어도 찾을 수 없다.) 미국에서는 언론인의 정치권 진출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존재하지 않아서일까.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에서 작년 수집한 데이터를 통해 미국 상·하원 의원들의 전직(중복 응답 허용)을 분석해 보면 언론인 출신은 거의 없었다. 상원의원 100명 중 단 1명만이 전직 언론인(공화당)이었고 하원도 전체 435명 중 약 3%(공화당 8명, 민주당 5명)에 불과했다.

상원의원 100명 중 48%가 선출직을 포함한 공직 경험, 45%가 검사 등 법조계 경력을 가진 것과 대비된다. 그다음으로 많은 30%(30명·공화당 20명, 민주당 10명)의 상원의원들이 기업·금융 분야 경력자였다. 교수 등 교육계 출신이 19%(19명·공화당 7명, 민주당 12명)로 그 뒤를 이었다. 군 출신의 비율도 16%(16명·공화당 9명, 민주당 7명)로 상당히 높았다. 반면 노동계 출신은 1명(공화당)으로 전직 언론인과 함께 매우 낮은 비중이었다.

마찬가지로 하원의원 435명 중 39.3%(171명·공화당 67명, 민주당 104명)가 공직 출신, 38.6%(168명·공화당 101명, 민주당 67명)가 기업·금융계 출신이었다. 법조계 출신이 29.7%(129명·공화당 45명, 민주당 84명)로 세 번째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고 교육계 출신이 13.8%(60명·공화당 18명, 민주당 42명), 군 출신이 17.0%(74명·공화당 53명, 민주당 21명)로 뒤를 이었다. 하원에서도 노동계 출신은 4.6%(20명·공화당 7명, 민주당 13명)로 언론인 출신보다는 많았지만 여전히 매우 소수였다.

결론적으로 입법을 담당하는 의회는 상·하원 모두 공직 경험과 법 지식을 가진 인물들이 많이 진출한 반면 전직 언론인들의 숫자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정치 엘리트를 감시하는 ‘파수견’인 언론인이 감시 대상인 정치권의 공천을 받아 정치에 입문하는 것은 이해 충돌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언론 종사자들의 직업의식이 높은 사회라면 극히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우리는 어떨까. 2020년 4월 19일자 연합뉴스 기사(‘21대 총선, 언론인 출신 의원들 3분의 2 물갈이’)에 따르면 21대 국회에서 전직 언론인 출신은 총 24명으로 전체 의원의 약 8%에 달했다. 이는 미국 상원의 약 8배, 하원의 약 2.7배다. 17대와 18대 국회에서는 언론인 출신 의원이 무려 36명(12.0%)과 35명(11.7%)으로 10%를 넘었다. 물론 언론계를 떠난 후 정치권으로 직행하지 않은 경우도 포함한 수치이지만 미국에 비해 ‘폴리널리스트’의 비중이 높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난주 KBS 수신료 분리징수 계획이 발표되자 KBS 사장은 “공영방송 길들이기”라며 “철회하면 사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맞받아쳤다. 필자가 지난 17대부터 21대까지 국회에 진출했던 전직 언론인 88명을 과거 소속 언론사별로 분류해 보면 KBS와 MBC 출신이 각각 16명과 15명으로 가장 많았고 다 합치면 30명(중복 제외)에 달했다. 전체 언론인 출신 국회의원의 3분의 1이 넘는다. 역시 공적 성격이 있는 YTN(2명)까지 합치면 전체의 거의 40%가 공영·준공영 방송 출신으로 볼 수 있었다. 영국과 미국의 공영방송인 BBC나 PBS 기자가 공천을 받아 정계로 진출한 사례가 몇이나 될까. 참고로 신문사 중에는 중앙일보(10명), 동아일보(9명), 한겨레신문(7명), 조선일보(6명) 출신이 많았다.

‘폴리널리스트’, 영어지만 미국에는 없고 한국에만 있는 말이다. 미국에는 ‘폴리널리스트’ 자체가 드물기 때문이다. 지난 20대 국회 당시 국감 회의록을 텍스트 분석해 보면 전직 언론인 출신 의원들은 다른 의원들보다 더 많은 발언을 쏟아냈다(1350단어 대 1204단어). 양극화가 심화되다 보니 각 정당마다 더 많은 ‘공격수’들이 필요해지고 평생 그런 훈련을 해 온 전직 언론인들은 매력적인 자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국회 본연의 업무인 효율적 입법을 위한 바람직한 국회 구성일까.


한규섭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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