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감한 그림 앞에서 할 수 있는 일[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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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절개된 화폭

루치오 폰타나의 ‘공간 개념’(1960년 작). 깨끗한 화폭 위에 칼자국을 낸 듯한 이 작품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루치오 폰타나의 ‘공간 개념’(1960년 작). 깨끗한 화폭 위에 칼자국을 낸 듯한 이 작품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현대 미술 작품 앞에 서면 종종 난감하다. 예컨대 루치오 폰타나의 ‘공간 개념(Concetto Spaziali)’ 같은 작품 앞에 처음 서면, 특히 난감하다. 뭐야, 이거. 무서워… 음… 이런 건 나도 하겠는데. 그도 그럴 것이 깨끗한 화폭 위에 칼자국을 쓱쓱 낸 것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세계의 미술관들이 앞다투어 이 작품을 받들어 모시는 것은, 이런 작품에 익숙한 이들이 만들어 온 관념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일견 허탈해 보이는 이런 작품을 즐기기 위해서는 일단 그 관념 세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그러기 위해 먼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은 묘사일까, 아니면 행위의 흔적일까. 묘사라면, 과연 무엇을 묘사한 것일까. 행위의 흔적이라면, 어떤 행위의 흔적일까. 인생에도 마찬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내 삶은 내가 원했던 삶을 잘 묘사해온 결과일까, 아니면 좌충우돌했던 내 행위가 남긴 흔적일까. 80세 생일을 맞은 어떤 노인의 모습은 그가 추구해온 삶의 표현일 수도 있고, 그가 평생 저질러 온 행위의 결과일 수도 있다. 어떤 이는 그 노인의 모습에서 어떤 삶의 완성 혹은 미완성을 보고 싶겠지만, 또 어떤 이는 이제 거의 다 방전되어 더 이상 행동 혹은 작동할 수 없게 된 인간 배터리를 볼 수도 있다.

다음 질문을 던져 보자. 이 절개된 화폭은 상징일까, 아니면 물건 그 자체일까. 상징이라면, 과연 무엇을 상징한 것일까. 물건 그 자체라면, 그 물성의 어떤 면을 음미하면 되는 것일까. 인생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삶이 어떤 가치를 상징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근육, 지방, 체액 등등이 조합되어 이루어진 인체라는 물건 자체일 수도 있다. 어떤 이는 전장에 쓰러진 군인 시체에서 자유 수호라는 상징을 보아낼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상처 입은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인체에 주목할 수도 있다. 이 혼탁한 세상에서 어떤 긍정적 가치를 수호하고 싶은 사람은 그 시체를 그 가치의 상징으로 간주하겠지만, 허울 좋은 가치의 범람에 지친 사람은 그 시체에서 애써 물성만을 응시할 수도 있다.

‘노르망디 공작부인 룩셈부르크 본의 기도서’(14세기 작품)에 실린 ‘예수의 상처’. 폰타나의 작품은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할 때 생겼다는 성흔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진 출처 메트로폴리탄박물관 홈페이지
‘노르망디 공작부인 룩셈부르크 본의 기도서’(14세기 작품)에 실린 ‘예수의 상처’. 폰타나의 작품은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할 때 생겼다는 성흔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진 출처 메트로폴리탄박물관 홈페이지
또 질문을 던져 보자. 이 절개된 화폭은 어떤 도상학적 전통에 있는 것일까. 이를테면, 세라 휫필드 같은 연구자는 폰타나의 이 작품에서 예수의 성흔(聖痕·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할 때 생겼다는 상처)을 읽어낸다. 실로, 서양 미술사에는 예수의 성흔을 묘사해 온 오랜 전통이 존재하고, 폰타나의 작품은 바로 그 전통을 현대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 폰타나에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정녕 예수의 성흔을 그린 건가요? 예술가들은 대개 그런 투박한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는다. 예술의 특징은 모호함과 다의성에 있는 법. 그저 관객의 해석에 맡길 뿐.

잭슨 폴록이 1950년에 그린 ‘가을의 리듬’.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잭슨 폴록이 1950년에 그린 ‘가을의 리듬’.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계속 질문을 던져 보는 거다. 이 절개된 화폭은 어떤 작품들과 경쟁하고 있는 걸까. 폰타나는 말년의 인터뷰에서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록을 대놓고 폄훼한 적이 있다. “폴록은 비범한 척 화폭을 물들였지만, 그건 반항적인 제스처에 불과했다.” 폴록의 작품은 흩뿌려진 물감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흔적들은 그 어떤 물체도 제대로 묘사하지 않는 것 같다. 관객이 거기에서 보아야 할 것은 그 뿌려진 물감이 묘사하는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라, 그렇게 물감을 뿌린 손의 움직임, 그리고 그 손을 움직인 개성, 혹은 주관이다. 타타타타타타… 그렇다. 폴록의 작품은 누군가가 뭔가 정신없이 자신의 주관적 표정을 난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폴록의 작품을 폄훼하는 폰타나의 작품은 어떤가. 물론 그의 작품 역시 폰타나라는 특정 개인의 산물이지만, 그의 작품에서 흩뿌려진 주관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폰타나는 최대한 물성 그 자체로 관객을 초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스처가 과한 작가들은 믿지 마세요, 그들은 미숙해요, 저의 절제된 세계로 오세요, 마치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그런 폰타나의 작품에서 주관적 표정을 읽어내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어서 질문할 수 있다. 폰타나의 작품은 미술사의 어떤 관습을 갱신하고 있나.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아마 약간의 지식이 필요할 것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폰타나가 화폭을 절개함으로써 2차원적 화폭을 3차원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화폭이 잘려 말려 올라가고, 그 아래 음영이 자리함에 따라 화폭 자체가 3차원이 되었다. 그림은 2차원이고 조각은 3차원이라는 도식 자체가 깨진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2차원이니 3차원이니 하는 분류 자체가 흔들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질문은, 나는 지금 뭘 느끼는가, 라는 질문이다. 폰타나의 절개된 화폭을 보다 보면 어젯밤 문서를 정리하다가 베인 손가락이 생각나기도 하고, 군 복무 시절 손등에 생긴 흉터가 떠오르기도 하고, 좀처럼 아물지 않는 마음의 상처가 연상되기도 한다. 아픈가. 상처가 떠올라서 아픈가. 그 아픔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천천히 그 아픔을 손끝에 올려놓고 어루만진 뒤, 마음의 보자기에 싸서 영혼의 서랍에 넣어 놓으면 된다. 폰타나의 작품을 보면서 자신의 상처를 잘 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은 어쩌면 폰타나에 대한 논문을 쓰는 것만큼 값진 경험일지 모른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난감한 그림#루치오 폰타나#절개된 화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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