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진영]가해자들의 ‘학폭’ 승리 공식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28일 21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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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가 학교폭력의 가해자로 지목됐다면? 상식적인 부모라면 피해 학생이 얼마나 다쳤는지부터 묻고, 가해 사실이 확인되면 아이와 함께 피해 학생과 부모를 찾아가 진심으로 사과하며 선처를 호소할 것이다. 더러는 피해 학생 탓을 하거나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정당화하는 몰상식한 부모들이 있다. 요즘은 변호사를 앞세워 법적 대응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법 기술자’들은 가해자의 손해를 최소화하는 데만 집중한다. 우선 피해 학생 쪽에 연락하지 말라는 조언부터 한다. 섣불리 사과하거나 합의를 시도하면 불리한 증거가 될 수 있다. 학교폭력위원회가 열리면 9단계 징계 조치 중 생활기록부에 기록이 남지 않는 ‘3호(학교 봉사)’ 이하 처분이 나오도록 한다. 그 이상의 징계 처분이 나오면 재심을 청구하고, 그래도 안 되면 징계 처분 취소 소송으로 시간을 끈다. 그래야 특목고든 대학이든 입시 전형이 끝날 때까지 학폭 전과 기재를 미룰 수 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된 지 하루 만에 물러난 정순신 변호사도 이 공식을 따랐다. 정 변호사 아들은 고1이던 2017년 5월부터 동급생을 언어폭력으로 괴롭히다 2018년 3월 학폭위 심의를 받게 됐다. 당시 현직 검사였던 아버지는 “학교의 선도 노력을 많이 막았고”, 진술서 작성을 지도했으며, 전학 처분이 나오자 재심 청구, 가처분신청, 징계처분 취소 소송으로 1년 가까이 전학을 미뤘다. 결국 아들은 수능 성적만으로 서울대에 합격했고, 피해 학생은 징계 처분이 지연되면서 몸도 학교 생활도 만신창이가 됐다.

▷대구 중학생이 학폭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후 2012년 학폭 징계 기록을 생기부에 남기는 제도가 도입됐는데 이를 계기로 학폭 전과 세탁을 위한 소송 수요가 생겨났다. 증거가 남는 신체폭력에서 언어폭력이나 은근한 괴롭힘으로 학폭이 ‘진화’하면서 법 기술이 개입할 여지도 커졌다. 서울행정법원엔 학폭 사건 전담 재판부가 신설됐으며 학폭 전문 변호사 17명이 활동 중이다. 간혹 억울한 가해자도 있지만 많게는 1000만 원이 넘는 소송비를 감당할 수 있는 소수가 시간을 끌며 징계를 피하는 동안 피해자는 2차 가해까지 감수해야 하는 부작용이 커지고 있다.

▷학폭이 소송전이 되는 순간 ‘선도’ ‘회복’ ‘화해’ 같은 교육적 가치에서 멀어진다. 정 변호사가 법 지식이 아닌 상식으로 대응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합당한 책임을 지게 했더라면 피해 학생은 일상을 회복하고, 아들은 훨씬 나은 사람이 됐을 것이다. 법 기술자 아버지의 그릇된 자식 사랑이 남의 아이와 제 자식과 스스로가 달리 살아갈 수 있었던 기회를 날려버렸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학폭#가해자#승리 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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