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만나고 온 아버지[공간의 재발견/정성갑]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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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
설 연휴를 앞두고 경기도 봉안당에 모신 아버지를 보고 왔다. 추석과 설, 1년에 겨우 두 번 가는 길인데 ‘어, 그때가 또 왔나?’ 생각하는 걸 보면 불효자임이 분명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엄마와 형, 누나가 단체로 함께했다. 그러다 몇 년이 지나면서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큰형, 엄마 그리고 나, 이렇게 셋만 찾아가게 됐다. 이번에도 그렇게 일정을 맞추었는데 큰형 내외가 제주도로 여행을 가고 마침 일산 쪽에 일이 있어 혼자만 가게 됐다.

혼자 가서 마주한 사진 속 아버지는 우물 같았다. 나를 비추고 그와 나 사이의 시간을 투영하는. 환한 얼굴로 제주도에서 말을 타고 계신 모습, 한복을 입고 엄마와 안방 자개장 앞에 앉은 모습, 유독 귀여워하셨던 둘째 손자 원준이와 카메라를 향해 웃고 계신 모습…. 친근하기도, 낯설기도 했다. 아버지가 하신 말 중 아픈 기억으로 남은 것이 하나 있다. ‘막둥이는 지 엄마만 좋아하지.’ 어느 날 엄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었다고.

아버지는 그 옛날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극히 가부장적이었다. 여름이면 상하의 모두 모시로 지은 옷을 맞춤복처럼 입고 다니셨는데 제때 풀칠과 다림질이 안 돼 있으면 엄마에게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그때는 그런 모습만 크게 보였다. 자식 사랑도,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끔찍했던 아버지는 지금의 봉안당도 본인이 직접 결정해 알려주셨다. 선산이 있는 곳에 본인을 묻으면 자식들 찾아오기 힘들고 오가는 길에 싸움만 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장례식 때 필요하다며 영정 사진으로 쓸 초상화까지 미리 준비하신 분이다.

자식 뒷바라지에 열심이었던 순간순간, 한 번씩 큰소리를 내고 화를 냈다고 내가 어떤 자격으로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아버지가 살아온 세월과 그 뒤에 가려진 수많은 진심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책임한 다정함과 무뚝뚝한 책임감 중에 어느 쪽이 더 묵직한 것인지를 이제 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엄마에게 아버지에 관해 묻는다. 엄마에게 아버지는 당찬 사람. ‘나 죽어도 엄마 집은 건들지 말아라.’ 자식들 단속해 놓은 아버지가 지금껏 고맙다고.

형, 엄마와 함께 갔을 때 아버지 앞에서 머무는 시간은 10분을 넘기지 않았다. 해가 거듭될수록 더 짧아졌다. 어쩌면 형식에 그친 순간들. 혼자 가서 물끄러미 아버지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저 오래 머무르게 됐다. 뒤늦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웠고 보고 싶었다. 아버지 역시 사랑했는데 말을 못했다. 어떤 공간은 혼자 들어갈 때 더 깊이 열린다.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
#설 연휴#아버지#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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