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자충수, 강제로 히잡 씌우기 [글로벌 이슈/신광영]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0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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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세 이란 여성이 ‘히잡 착용 불량’으로 체포된 후 의문사한 사건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시위가 지난달 24일 그리스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에서 열렸다. 한 여성이 항의 표시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다. 아테네=AP 뉴시스
22세 이란 여성이 ‘히잡 착용 불량’으로 체포된 후 의문사한 사건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시위가 지난달 24일 그리스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에서 열렸다. 한 여성이 항의 표시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다. 아테네=AP 뉴시스
신광영 국제부 차장
신광영 국제부 차장
요즘 이란 수도 테헤란의 거리에는 히잡을 벗고 뭉텅뭉텅 잘려나간 생머리를 드러낸 여성이 적지 않다. 어색하게 잘린 머리칼은 히잡 착용을 강요하는 정부에 저항하는 영광의 상처들이다.

이란 여성들의 ‘히잡 시위’는 1970년대에도 있었다. 그때는 검은 히잡을 쓰는 게 저항의 표시였다. 당시 친미 성향의 팔레비 왕조는 서구화를 밀어붙이며 히잡을 금지했다. 40∼50년의 시차를 두고 정반대 시위가 벌어지는 듯하지만 여성들의 요구는 달라진 게 없다. 히잡을 강제로 씌우거나 벗기지 말고 선택의 자유를 달라는 것이다.

히잡은 머리를 가릴 때 쓰는 천 조각이다. 쓸지 말지를 자율에 맡겼더라면 히잡은 자연스러운 이슬람 문화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정권이 각자 목적에 따라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악용하면서 히잡은 첨예한 정치적 상징으로 변질됐다.

1979년이 중대한 분기점이었다. 서구화·세속화를 위해 히잡을 못 쓰게 했던 팔레비 정권이 이슬람혁명으로 축출되고, 율법학자 출신인 호메이니가 집권한 해였다. 새 정권은 타락한 여성들을 ‘해독시킨다’며 히잡 의무화를 꺼내들었다. 눈에 쉽게 띄는 히잡이야말로 ‘이슬람 원칙을 바로 세운다’는 정체성을 피부로 와 닿게 해줄 최적의 소재였다.

그런데 미니스커트를 입던 여성들에게 억지로 히잡을 씌우자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여성들의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만연했던 서구화의 흔적이 제거되고 엄격한 이슬람 사회로 뒤바뀌자 보수적인 부모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딸들이 집을 떠나 대학에 가더라도 서구 문화에 물들 우려 없이 안전해졌다고 느끼게 됐다. 이후 여성의 대학 진학률은 계속 올라 지금은 남성보다 높은 70%에 달한다.

고학력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자 부조리에 눈뜨는 여성이 많아졌다. 스포츠 경기장에 여성 출입을 금지하는 등의 성차별적 악습은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히잡 강제화에 반대하는 시위도 꾸준히 벌어졌다. 게다가 히잡을 똑바로 썼는지 단속하는 도덕경찰은 강자에겐 느슨하고 약자에겐 가혹했다. 이들은 부자나 정부 관리의 가족이 사는 지역을 거의 순찰하지 않는다. 이런 불공정은 다른 모든 종류의 차별을 경험한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들였다.

한 달 사이 100여 개 도시로 퍼진 시위에는 1970년대 ‘히잡 착용 금지’에 저항했던 중년 여성들이 ‘히잡 착용 강제’에 맞서는 딸과 손녀를 위해 합류하고 있다. 테헤란 시위에 나온 20대 여성은 말했다. “엄마뻘인 분들이 히잡을 쓰고 나온 걸 보면 눈물이 나고, 싸울 용기가 나요. 여기는 체포, 부상,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전쟁터란 말이에요.”

지난 수십 년간 시위가 벌어질 때마다 무력으로 진압해온 이란 정권은 이미 200명이 넘게 숨진 이번 시위도 잠재울 수 있을까. 이란 역사상 처음으로 2030 여성이 주축인 이번 히잡 시위에는 젊은 남성들과 서민층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40년 넘게 이어진 미국의 제재로 일자리가 없는데 물가는 10년 새 7배가 뛰고, 빈곤층이 인구 절반을 넘어선 상황에서 “더는 잃을 게 없다”며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유례없는 속도로 늘고 있다.

SNS에 올라오는 시위 영상을 보면 진압작전에 투입된 경찰관들이 며칠째 잠을 못 자 길가에 주저앉은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누이, 연인, 친구, 엄마 같은 사람들에게 최루탄을 쏘고 곤봉을 휘둘러야 하는 그들 역시 지쳐가는 듯 보인다.

무엇보다 지금의 사태를 “미국과 이스라엘이 기획한 폭동”이라고 일축하는 이란 최고지도자의 억지는 이란을 지탱해온 시민들의 신앙심을 치명적으로 손상시키고 있다. 시위에 나온 한 중년 여성은 “나는 신실한 이슬람 신자이지만 이 정권이 우리 보통 사람들을 먼지처럼 취급하는 위선에 질렸다”고 했다.

히잡이 의무가 되는 순간 히잡 착용은 더 이상 종교적 믿음에 따른 것이 아닌, 수동적 행위로 전락한다. 요즘 테헤란 쇼핑가에선 손님과 히잡을 파는 상인이 조롱 섞인 대화를 나눈다.

“사장님, 장사 이제 접으시죠. 히잡은 끝났어요.”

“사세요. 사서 태우지 그래요(웃음).”

이란 정권은 국제적 고립과 망가진 경제를 해결하기에도 벅찬 와중에 고급 인적 자원인 여성과, 중산층, 다수의 온건한 이슬람 신자들을 내부의 적으로 돌려세웠다. 히잡의 상징성을 활용해 권력을 공고히 하려다 오히려 ‘히잡의 힘’으로 결집한 전 국민적 저항에 봉착했다. 강제와 억압으로 뭔가를 이루려 하면 결국 최악의 좌충수로 돌아온다는 것을 벼랑 끝에 놓인 이란을 보며 다시 떠올리게 된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
#이란#히잡#강제#최악의 자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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