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모드공유하기
동아일보|오피니언

‘오이디푸스 왕’이 경고한 가상의 위험[조대호 신화의 땅에서 만난 그리스 사상]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입력 2022-07-01 03:00업데이트 2022-07-01 04:17
글자크기 설정 레이어 열기 뉴스듣기 프린트
글자크기 설정 닫기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평화롭던 도시 테베에 위기가 닥쳤다. 반인반수의 괴물 스핑크스가 나타나 수수께끼를 내고 풀지 못하는 사람들을 잡아갔다. 신탁의 도움을 구하려던 왕의 노력도 실패했다. 그는 델피의 신탁소로 가는 길에 살해당한다. 괴물의 출현에 왕까지 없으니 엎친 데 덮친 격. 테베가 위기를 극복한 것은 젊은 나그네 덕분이었다. 그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왕비를 취해 왕위에 올랐다. 그렇게 평화가 찾아왔는데, 20년 뒤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이번에는 역병이었다. 유능한 왕은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까?》

범인 쫓는 범인

비극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등을 쓴 소포클레스의 흉상. 소포클레스는 그리스 비극 경연에서 18차례나 우승한 당대 최고의 작가였다. 사진 제공 조대호 교수
그리스 비극 작품들 가운데 최고로 손꼽히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역병에 신음하는 테베 사람들의 탄원 장면에서 시작한다. 백성을 아끼는 왕이 그들의 고통을 모를 리 없다. 백성의 고통은 그의 고통이 아닌가. 그런데 역병의 원인을 찾아 신탁에 조회한 왕은 또다시 운명의 수수께끼와 마주친다. ‘선왕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추방하라!’ 살해자가 테베 안에 숨어 있었나? 20년이 지난 사건의 범인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사건 수사는 왕궁의 뜰을 벗어나지 않는다. 라이오스의 살해자를 찾는 오이디푸스, 그가 바로 범인이었으니까. 그래서 ‘오이디푸스 왕’은 추적자가 범인으로 드러나는 발견의 드라마이다.

그리스인들은 진리를 ‘알레테이아(aletheia)’라고 불렀다. 이 낱말은 본래 ‘숨겨진 것의 드러남’, ‘망각의 탈피’를 뜻한다. 그런 뜻에서 ‘오이디푸스 왕’은 알레테이아의 사건을 보여준다. 드라마가 전개되면서 오이디푸스의 숨겨진 과거에 관여한 사람들이 하나 둘 등장하고, 이들의 증언을 통해 범인의 정체, 아니 추적자의 정체가 드러난다. 어떻게 추적자가 범인일 수 있었을까?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았다는 사실을 모른 채 20년간 ‘가상의 행복’을 누린다. 테베의 역병을 해결하기 위해 선왕의 살해자를 찾기 시작하지만 정작 범인은 그 자신이었다. 조제프 블랑이 그린 ‘라이오스의 살해자 오이디푸스’(1867년·왼쪽 사진)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1808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신탁이 비극적 사건의 발단이었다. 테베의 왕과 왕비는 태어난 아이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는 끔찍한 신탁을 듣고 갓난아기를 버리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아이를 불쌍히 여긴 양치기 때문에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양치기는 산에서 만난 코린토스의 양치기에게 아이를 넘겼고, 이 양치기는 아이를 다시 자기 나라의 왕과 왕비에게 바쳤다. 버려진 왕자가 입양된 왕자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비밀은 언젠가 드러나는 법, 성인이 된 오이디푸스는 어느 날 ‘양자’라는 말을 들고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신탁소를 찾았다. 그에게 내린 신탁은 오래전 친부모가 들었던 것과 똑같았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의 부모를 피해 그 반대 방향, 테베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마차를 몰고 신탁소로 달려가던 사람들의 일행과 마주쳐 시비 끝에 그들을 살해했다. 보행자와 운전자 사이의 다툼이 친족 살해로 이어진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숨겨진 진실은?
증인으로 왕 앞에 불려 나온 사람들 가운데 숨겨진 과거를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나. 진실의 대가가 어떤 것일지 그들은 잘 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추궁은 집요하다. 파국을 예감한 어머니이자 아내 이오카스테가 오이디푸스를 만류해도 소용없다. 마침내 가상의 구름 사이에서 진리의 빛이 드러나자 끔찍한 과거를 견딜 수 없는 이오카스테는 왕실로 뛰어든다. 곧이어 왕비가 목을 매었다는 말을 듣고 방 안으로 달려간 오이디푸스, 잠시 뒤 무대에 등장한 그의 두 눈에서는 피가 흘러내린다. 이오카스테의 브로치로 두 눈을 찌르고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는 왕 앞에서 코로스의 합창이 울려 퍼진다. “아아,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의 무리여./그대들의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어떤 자가, 어떤 인간이 더 많은/행복을 누릴까?/그 행복은 한낱 가상이요 가상은 파멸한다.”

기원전 429년, 아테네에 역병이 창궐해서 전체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죽었다. ‘오이디푸스 왕’은 그 직후에 공연되었다. 연극을 보고 극장을 나선 사람들에게는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을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왜 파멸했나? 파멸은 그의 잘못 때문인가? 그가 무엇을 잘못했나? 그는 신탁의 희생물이 아닌가? 운명의 덫을 벗어날 선택의 자유가 그에게 있었나? 집요하게 과거를 파헤친 것이 그의 잘못일까? 이런 질문들은 그리스 비극 연구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오이디푸스 왕’은 ‘운명극’인가, ‘죄와 벌의 드라마’인가, 아니면 ‘수사극’인가? 코로스의 합창은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이 어째서 인간의 운명일까?

아름다운 가상에서 추악한 진실로
‘오이디푸스적 가상’에서 질문의 대답을 찾아보자. ‘오이디푸스적 가상’이란 무지의 베일에 가려진 자신의 본모습을 보지 못하는 인간의 가상이다. 오이디푸스는 영리한 해결사이고 네 자녀의 아버지이며 백성의 존경을 받는 왕이었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실제이지 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한 점에서 그는 가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살해자이자 패륜아로서 자신의 과거가 그에게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역병이 닥치기까지 20년 동안 오이디푸스는 아름다운 가상 속에서 산 행복한 왕이었다!

가상 속의 행복이 오이디푸스만의 것일까?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 아니 인간 전체가 가상을 만들고 거기서 행복을 찾는다. 이는 다른 동물이 갖지 못한, 인간에게 고유한 능력이다. 우리는 지상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했고 그 덕분에 얼마나 잘살고 있나? 과학과 기술 문명의 성취, 자본주의적 생산의 경제적 성취는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 아닌가? 실제로 그렇다. 분명 그것들은 가상이 아닌 실제이다. 하지만 그것을 전부라고 여기는 순간 우리도 ‘오이디푸스적 가상’에 붙잡힌다. 문명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파괴, 효율적 생산과 풍요로운 소비를 위해 우리의 현재와 미래가 치러야 할 대가가 화려한 성취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으니까. 그러니 21세기 인간의 ‘행복’은 오이디푸스의 행복처럼 아름다운 가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나.

아름다운 가상에서 추악한 진실로 눈을 돌리는 건 누구에게나 고통스럽다. 많은 사람이 가상에 사로잡혀 자기를 잊으려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삶이 고단할수록 더 그렇다. 하지만 ‘오이디푸스 왕’은 그렇듯 아름다운 가상에 취한 행복에 대해 경고한다. “그 행복은 한낱 가상이요, 가상은 파멸한다.” 가상의 껍데기는 숨겨진 것의 드러남을 막을 수 없다. 가상의 파멸은 무섭고 끔찍한 알레테이아의 사건이다.

오이디푸스는 가상이 깨어지는 순간까지 추악한 진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극적 영웅이다. 추악한 진실을 파헤친 그의 행동이 테베를 구했다. 역병이 그로 하여금 숨겨진 진상에 눈을 돌리게 한 계기였다. 똑같이 역병을 겪은 우리도 아름다운 가상 뒤의 숨겨진 진실을 응시하고 있나?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댓글 0
닫기
많이 본 뉴스
오피니언
베스트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