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투자가 지킨 동맹, 정치가 흔들면 안 된다[광화문에서/이상훈]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2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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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국제부 차장
이상훈 국제부 차장
올해 한국의 최대 외교 이벤트는 단연 5월 한미 정상회담이었다. ‘한미 동맹은 70년 전 전장에서 어깨를 맞대고 함께 싸우면서 다져졌다’는 양 정상 공동선언의 첫 문장은 동맹의 공고한 뿌리를 보여줬다. 한국만의 착각이 아니다. 지난해까지 주미 일본대사로 있던 스기야마 신스케(杉山晋輔) 전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은 최근 일본의 민방 프로그램에 나와 이렇게 말했다. “트럼프 정부에서도 바이든 정부에서도 ‘한미 동맹은 함께 피를 흘린 동맹이라는 걸 잊으면 곤란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한미 관계를 둘러싼 일각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건 한국의 기업들이다. 정상회담 때 발표된 44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 계획은 흔들림 없는 양국 간 경제 파트너십을 보여줬다. 한국 기업들의 반도체, 배터리 투자는 대중국 견제를 위한 새로운 기술 동맹의 시작이자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핵심이다.

한국에 투자되는 달러가 우리의 안보를 지켜준다고 믿던 때가 있었다. 1972년 신진자동차와 미국 GM이 공동 출자해 GM코리아(현 한국GM)를 설립했을 때 한국 정부는 “주한미군 1개 사단을 주둔시키는 것보다 GM 공장을 한국에 세우는 게 안보에 더 낫다”고 반겼다. 이제는 한 발 진화했다. 한국 땅에 들어오는 외국인직접투자(FDI)에 더해 최첨단 기술과 대규모 자본을 갖춘 한국 기업들의 적극적인 글로벌 투자가 우리 안보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텍사스의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조지아의 SK 배터리 공장, 오하이오·테네시의 LG 배터리 공장은 경제적 이익과 가치관을 공유하는 한미 동맹의 상징이 됐다.

문제는 앞으로다. 새해 새로운 5년을 시작하는 새 정부를 누가 이끌게 되든, 자유민주주의와 동맹의 가치를 의심하게 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외교로 안보를 시험대에 올리는 것은 한국 경제와 세계 공급망을 떠받치는 기업을 위해서도 삼가야 할 일이다. 기업들의 투자가 든든하니 정부가 뭘 해도 용인될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과 철없는 행동은 국가 운명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어정쩡한 자세와 모호한 수사로 정체성을 의심받아 온 지난 5년간의 한국 외교 앞에 기업들의 대규모 투자는 한미 동맹과 지역 안보를 지켜낸 보루였다. 대만이 세계 최대 반도체 업체 TSMC를 지렛대로 삼아 미국, 유럽연합(EU), 일본 등과 유례없는 밀월관계를 형성하며 당당한 글로벌 외교 전략을 펴는 것은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은 새로운 경제동맹 구상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의 실현에 나서며 경제 통상과 안보를 하나로 묶고 있다. 재편되는 글로벌 공급망에서 한국이 린치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한국 기업들은 이미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정부는 선도(先導)에 설 준비가 됐을까. 대선 주자라면 새 정부 외교정책의 첫 번째 과제로 이 물음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상훈 국제부 차장 sanghun@donga.com


#기업 투자#정치#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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