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지긋지긋한 짝사랑, 그만두면 안 되나

주성하 기자 입력 2021-11-11 03:00수정 2021-11-1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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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왼쪽 사진)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9월 유엔총회에서 한반도 종전선언을 제안한 지 벌써 한 달 반이 넘었다. 그러는 사이 한국에선 차기 대통령 후보가 정해져 정치권은 대선 정국에 들어갔다. 임기가 몇 달 남지 않은 대통령이 종전선언을 매듭지을 것이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김정은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이미 머릿속으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당선되는 경우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당선되는 경우 어떻게 한국 정부와 상대할지 주판알을 튀기고 있을 것이다.

일단 두 후보의 대북 공약을 보면 파격적이라고 볼 것이 거의 없다. 이 후보는 햇볕정책을 계승하겠다고 했고, 윤 후보는 비핵화 진전에 따른 단계별 남북 화해 정책을 펼치겠다고 해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김정은 처지에서 볼 때 전혀 구미가 당길 만한 매력 포인트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어떠한 파격적인 대북정책 공약을 내놓아도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일 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김정은이 잘 알 수밖에 없다.

김정은이 집권 이후 상대했던 남쪽의 3개 정부만 봐도 공약과 현실은 전혀 달랐다. 이명박 정권의 ‘비핵개방 3000’은 구호부터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핵을 폐기하면 북한의 국민소득을 3000달러로 만들어 준다는 것인데, 북한이 임기 5년짜리 이명박 정부를 믿고 핵을 폐기하겠다고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서로 불신하는 적대관계에서 “제일 소중한 것을 버리면 얼마를 준다”는 제안은 초등학교에서도 통하지 않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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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라는 구호를 내놓았지만 신뢰는 고사하고 개성공단까지 폐쇄했고 남북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불신이 가득 쌓였다. 이렇게 과거 두 보수 정부의 대북 정책을 평가하면 “우린 잘하려 했는데 김정은이 호의를 악으로 갚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반박도 나올 수 있겠지만 대북정책은 원래 그럴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김정은의 처지에선 보수 정부보다는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떠올리면 제일 분통이 터지지 않을까 싶다. 보수 정부에는 기대감조차 없었다면 문재인 정부에는 큰 희망을 걸고 판문점에 나타났고 멀리 싱가포르, 베트남까지 행차하며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결과적으로 얻은 것이 전혀 없다. 개성공단과 금강산을 열지도 못한 데다 대북제재는 더 강화됐고 대북 지원을 받은 것도 없다. 대박을 기대하고 무대 위에 올라가 열정적으로 쇼를 펼쳤지만 아무런 페이도 받지 못한 배우 신세가 된 것이다. 지금쯤 김정은은 “다시는 남조선 놈들의 번지르르한 말에 속아 농락당하지 않겠다”고 이를 갈지도 모르겠다.

대선 무대에 등장한 두 후보의 캐릭터를 놓고 봐도 김정은이 혹할 만한 포인트가 보이진 않는다. 이재명 후보를 문재인 대통령보다 더 신뢰할 수 있을까. 윤석열 후보가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보다 더 화끈하다고 기대할 수 있을까. 김정은의 머릿속도 복잡할 것이다.

대통령 선거에 투표할 한국 국민들도 대북관계에 큰 기대가 없긴 마찬가지다. 누가 되더라도 대북 공약만 놓고 보면 데자뷔 ‘시즌2’인 셈이기 때문이다. 대북정책에 대한 기대감이 남북 모두 이렇게 바닥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이럴 때엔 관점을 바꿔 보는 것이 어떨까. 이번 정당 경선 중에 ‘남북 불간섭과 체제 경쟁주의’로 전환하겠다는 홍준표 국민의힘 후보의 공약이 눈에 들어왔다. 한마디로 “너흰 위대한 김정은주의를 내걸고 공산주의를 만들어서 잘살아라. 우린 상관하지 않고 우리 길을 가겠다”로 요약된다. 호전적인 정책 같아 보이지만 사실 일상에선 가장 흔한 관계 정리다.

왜 우리만 수십 년 넘게 북한을 짝사랑하며 먼저 구애를 해야 하는가. 남녀의 사랑에서도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늘 양보할 수밖에 없다. 수십 년 짝사랑하며 뺨을 맞아도 참고 웃어주면 버릇이 잘못 들고, 주종관계가 굳어진다. 짝사랑하다 먹히지 않으면 그만둘 줄도 알아야 한다.

“너는 너대로 잘살고, 나는 나대로 잘살게. 이젠 너 없이도 잘살 수 있을 것 같아. 남남이 됐으니 과거 버릇 고치지 못하고 괴롭히면 가만있진 않겠지만 도와달라고 하면 옛정을 봐서 도와줄게.” 이런 것은 연인 관계에서 매우 흔한 관계 정리다.

오랜 기간 짝사랑했는데 먹히지 않았다면 관계의 주도권을 한 번쯤 상대에게 넘겨보는 것은 어떨까. 점점 가난해져 파산 상태에 몰린 상대에게 나를 잡을지, 뺨을 칠지 결정하게 하는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내가 크게 손해 볼 것은 없지 않은가.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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