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 노스탤지어와 이삿짐, 그리고 LP장[임희윤 기자의 죽기전 멜로디]

임희윤 기자 입력 2021-03-05 03:00수정 2021-03-05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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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23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의원회관에서 떠나는 의원들의 짐이 복도 앞에 나왔다. 너무 많은 이삿짐은 늘 골칫거리다. ‘이걸 다 버려, 말아?’ 동아일보DB
임희윤 기자
이삿짐이라 쓰고 멍에라 읽기로 했다. 얼마 전 이사를 했는데 집 넓이를 약 50m²나 줄여서 왔다. 싸게 팔 때 신나게 쟁여둔 생활필수품을 둘 곳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더 큰 난관은 낙오자 없이 죄다 고이 모셔 온 수천 장의 CD와 LP 음반 ‘님’들께서 기거하실 곳이었다.

테트리스 하듯 줄자로 재가며 가구 배치를 한 끝에 작은 방에 새로운 LP장 하나를 들일 수 있었다. 새 LP 수납장에 손때와 세월의 흔적이 얼룩진 옛 LP들을 꽂으면서 그제야 한 장, 또 한 장을 새삼 눈에 담았다. 그간 별로 꺼내질 일 없이 무더기로나 존재감을 과시하던 옛 LP들에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Moonmadness’(캐멀) ‘The Last Waltz’(더 밴드) ‘Long Live Rock ‘n’ Roll’(레인보)…. 오래된 아보카도처럼 갈변한 그 고색창연의 표지들을 쓰다듬으며 다섯 개의 음절을 나의 뇌는 점자처럼 읽어낸 것이다. ‘노스탤지어’….

#1. 2월 말에 공개된 ‘딥 노스탤지어’ 서비스가 온라인에서 화제다. 옛 가족사진을 활동사진, 즉 짧은 동영상으로 만들어주는 것인데 이를테면 그리운 고인의 ‘씩’ 웃는 미소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용 방법이 쉬운 데다 무료 체험판이 있어 누리꾼들이 이런저런 딥 노스탤지어 영상을 앞다퉈 올리고 있다.

#2. LP 표지 속 인물은 저마다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더벅머리의 20대 청년 비틀스는 ‘난 당신의 영원한 연인’이란 표정으로 웃고 있었고, 프랑수아즈 아르디는 ‘내가 프랑스의 연인’이라는 듯 우아한 옆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1960년대의 밥 딜런은 ‘노벨 문학상 따위는 모르겠고 여자친구와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그저 짱’이라는 듯 뉴욕 웨스트빌리지 4번가를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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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딥 노스탤지어’는 향수를 자극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가끔 또는 자주 조금 소름 끼치는 서비스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우리의 짓궂은 인류 누리꾼들은 자기 할아버지나 이모의 사진에 금세 지루함을 느끼고 별세한 유명인, 심지어 유명한 회화나 삽화, 조각 작품 속 인물에 ‘딥 노스탤지어’를 적용해 생동하는 영상을 만들어 돌려보며 품평을 하고 있다. 화면을 향해 눈동자를 돌린 뒤 엷은 미소를 짓는 유관순 열사는 조금 뭉클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동공을 굴리는 다비드상, 느끼한 미소를 날리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동상은 보는 순간 오싹해져 닭살이 돋는다.

#4. 어원으로 치면 ‘딥 노스탤지어’는 깊은 향수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딥 페이크’가 그렇듯 인공지능(AI)의 딥러닝 기술에서 앞 글자 딥(deep)을 따다 붙인 조어다. 딥 페이크가 비록 애당초 ‘깊은 가짜’를 뜻하는 바는 아니지만 진짜처럼 심도 깊은 가짜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깊은 가짜’와 느낌이 통한다면 ‘딥 노스탤지어’는 전혀 다르다. 딥러닝을 활용했을 뿐 그것이 구현하는 향수가 깊은 수준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5. 음악계에는 지금껏 딥 노스탤지어와 비슷한 부분을 지향하는 콘텐츠가 여럿 있었다. 미국의 소프트웨어 회사 ‘젠프’가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1932∼1982)의 연주 특성을 컴퓨터로 분석해 인위적으로 ‘재연’해 녹음한 2007년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 ‘리-퍼포먼스’는 발표 당시에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2012년 미국 코첼라 페스티벌 무대에는 전설적 래퍼 투팍(1971∼1996)이 홀로그램으로 등장해 화제가 됐다. 근래에 다른 곳도 아닌 한국의 TV 방송에서는 세상을 떠난 터틀맨, 김현식, 김광석, 프레디 머큐리가 그들의 사후에 발표된 곡을 부른 것을 들려줬다. 모창 AI에게 그들의 가창을 딥러닝시킨 결과다. 방탄소년단이 속한 빅히트엔터테인먼트는 지난 연말 릴레이 온라인 콘서트에서 생전의 신해철을 무대에 소환했다. 빅히트는 최근 모창 AI 기술을 보유한 기업 ‘수퍼톤’에 40억 원을 투자한다고 밝혔다.

#6. 오늘밤, 집에서 ‘딥 노스탤지어’를 가동시켜 볼 참이다. 첨단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할 생각은 없다. LP장에 욱여넣은 LP들을 하나하나 다시 꺼내 머리와 가슴으로 스캔해 볼 작정이다. 드럼 심벌 소리 하나에, ‘예스터데이(Yesterday)∼’ 하는 속삭임 하나에 심장이 방망이질하던 어떤 계절을 재생해 보려 한다. 해리포터 시리즈 속 ‘예언자일보’의 활동사진 같은, 그런 진짜 마법은 언제나 마음에서 먼저 일어나는 법이니까.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딥 노스탤지어#이삿짐#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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