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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올해 로제와인에선 좀 슬픈 맛이 날지도 몰라[포도나무 아래서]<60>

신이현 작가
입력 2020-08-18 03:00업데이트 2020-08-1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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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
폭우가 쏟아지는데 친구 포도밭에서 전화가 왔다. 포도나무가 물을 너무 많이 먹어 포도송이가 터지고 있으니 어서 수확해 가라는 것이었다. 비상깜빡이를 켜고 기다시피 갔더니 농사지은 친구가 한숨을 푹푹 쉬고 있다. 그 옆에는 택배를 위한 빈 박스가 가득 쌓여 있다. 원래는 주문받은 포도를 모두 발송한 뒤 2차로 우리가 수확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포도송이가 비를 견디지 못하고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몇 알씩 터졌지만 싱싱해서 택배를 해도 될 것 같은데 친구는 소심했다. 남에게 싫은 소리 듣는 것을 못 견디는 성격이다. 밤마다 쏟아지는 폭우에 잠 못 이루고 서성이느라 입술이 다 터져 있었다. 지난겨울부터 가지치기 하고 풀 베고 보살피며, 약 안 치고 농사짓는다고 갖은 애를 썼는데 올해 농사 헛지은 셈이 되어버렸다. 쭈그리고 앉아 담배만 푹푹 피워댔다. 비가 억수로 쏟아져서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이 순간을 넘기는 포도는 더욱 나빠질 것이다. 급히 빨간 장화 총각과 근처 친구도 불렀다.

빗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온 세상이 잠겨버릴 것 같은 풍경이었다. 물이 한가득 고인 장화를 끌고 다니며 포도송이를 따자니 깊은 물속에서 미역이나 성게를 따는 기분이 들었다. 급하게 부른 친구는 도움이 안 되었다. 두어 양동이 따더니 포도나무 아래 쪼그려 앉아 연방 “아이고” 소리를 냈다. “니 이래 고생해가 우야노. 돈 주고 술 한잔 사묵지 머 한다꼬 이카는데… 인자부터 이 고생을 우얄라카노….” 주머니에서 다 젖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려고 애를 쓰더니 안으로 들어가서는 나올 생각을 않는다.

소나기는 등을 때리고 또 때린다. 맞는 건 등인데 웬일인지 가슴 저 안이 찡하니 아프다. “올해는 워터파크 안 가도 되겠어요!” 빗속에서도 혈기 넘치는 빨간 장화 총각이 농담을 하지만 레돔은 대답할 겨를도 없이 포도 상자를 트럭으로 실어 나른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포도는 보이지도 않았고 이제 남은 것들은 어쩔 수 없다!

포도는 서늘한 양조장 어둠 속에서 하루 말리기로 했다. 따놓은 포도 생각에 레돔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새벽같이 달려가 착즙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울트라 대형 사고는 1차 착즙이 끝나갈 무렵에 일어났다. 착즙기 안에서 고무공이 펑 소리를 내면서 찢어져버린 것이다. 포도가 아직 신선할 때 착즙해야 하는데 큰일 났다! 수입한 기계가 말썽을 일으키면 사람을 부를 수도 없고 어떻게든 알아서 해야 한다. 레돔은 사색이 되어 기계 부품을 하나씩 풀기 시작한다. 이웃까지 급하게 투입되어 새로운 고무공을 끼우고 쇠막대기를 조립하며, 과연 고쳐질지 모를 두려움을 안고 땀을 한 바가지 흘리며 낑낑댄다. 결국 기계는 고쳐졌고 레돔과 이웃 남자는 뜨겁게 악수를 하고 웃는다. “이제 착즙기를 새로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착즙기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미뤘던 택배 발송을 하려고 우체국에 갔더니 다음 날이 택배 쉬는 날이라고 한다. 이어지는 연휴까지 겹쳐 거의 일주일이 늦어지게 되었다. 고객들에게 죄송하다는 메시지를 보내면서 나는 왠지 죽을죄를 지은 것만 같다. 미친 비나 좀 그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양조장으로 오니 수영장에 들어온 것만 같다. 흐느적거리며 장작개비를 들고 와 난로에 불을 피워본다. 일렁이는 붉은 불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조금씩 너그러워진다. 젖은 벽과 탁자가 마르기 시작하자 세상이 긍정적으로 느껴진다.

마침 레돔이 착즙을 마친 갓 짠 포도즙을 한 잔 가지고 와 이렇게 말한다. “올해는 작년보다 당도가 좀 떨어지고 새콤함이 좀 더 강하네.” 즙에서 갓 딴 딸기와 레몬그라스 향이 올라온다. 폭우 속 수확과 착즙기 수리의 그 모든 난리가 거짓말인 듯 포도에서 흘러나온 즙은 평화롭다. 한 잔 마시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사람들은 향긋하지 않은 와인을 용서하지 않겠지만 농부는 안다. 포도는 인간을 위해 늘 상냥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올해 담근 로제 와인에서는 슬픔의 맛이 좀 날 것 같아.” 내 말에 레돔은 픽 웃는다.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신이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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