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임우선]오늘 하루, 우리는 몇번의 살인을 했는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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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우선 정책사회부 기자
임우선 정책사회부 기자
“그거 봤어요? 숙명여고 기사 뜰 때마다 계속 댓글이 달리던데…. 이번에 문제가 된 그 숙명여고 교무부장 말이에요. 김상곤 전 사회부총리 세 딸 담임이었대요. 그래서 그 딸들이 다 명문대 치대에 갔다던데….”

얼마 전 만난 교육계 인사가 “취재를 해보라”며 한 말이다. 기자는 “그거 낭설이다”라고 답했지만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지난해 6월 김 전 부총리가 내정됐을 때 기자는 이미 ‘인사 검증’ 취재를 했다. 후보자의 학력과 경력, 재산부터 가족 관계에 이르기까지…. 자녀 관련 확인도 그중 하나였다.

김 전 부총리에게 세 딸이 있는 것은 팩트다. 그러나 그의 장녀는 숙명여고가 아닌 Y여고 출신이다. 차녀와 삼녀는 숙명여고를 나왔지만 진학한 대학은 둘 다 ‘명문대 치대’와 거리가 멀다. 삼녀의 경우 서울 주요 대학 출신이긴 하나 법학을 전공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런데도 거짓들 사이에 ‘세 딸’과 ‘숙명여고’ 등 일부 팩트를 교묘히 섞은 낭설이 활개치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며칠 전 또 다른 이는 “숙명여고 전 교감에 대한 소문을 들었느냐”며 ‘제보(?)’를 해왔다. 내용인즉 “전 교감 딸도 숙명여고를 나왔는데 학부모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지방대에 갔다고 해명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지방대 ‘의대’여서 엄마들이 열 받았다”는 것이다.

전 교감에게 사실관계를 물었다. 그랬더니 “외동딸이 있는데 강북에 있는 여고를 나왔고 이미 대학을 졸업해 공무원이 됐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왜 해명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학교가 이 지경이 됐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며 말을 아꼈다.

김 전 부총리도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야당까지 나서서 의혹을 제기하자 결국 16일 교육부를 통해 공식 설명자료를 냈다. 퇴임한 장관이 부처를 통해 보도자료를 내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는 ‘이 일이 제가 해명까지 해야 할 일인지 오랫동안 망설였습니다만…’으로 시작하는 글을 통해 낭설을 하나하나 해명했다. 인터넷 카페와 뉴스 댓글을 중심으로 퍼진 ‘카더라 통신’에 전직 부총리마저 속앓이하는 모습은 우리 사회의 참담한 민낯이 아닐 수 없다.

전직 부총리는 공인이니 유명세를 치른다 치자. 얼마 전엔 한 어린이집 교사가 ‘아동학대범’으로 몰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났다. 학부모들이 누군가에게 들었다며 아무 생각없이 나눈 대화가 이 교사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한국인의 ‘남 얘기’는 일종의 문화다. 둘만 모이면 누군가를 거론하며 친밀감을 확인한다. 여기엔 때로 ‘일그러진 욕망’이 투영된다. 돈과 권력, 학벌, 사회적 관심, 도덕적 우위 등이 뒤엉킨 욕망 속에서 남을 끌어내리고 나를 높이기 위해 아무런 죄책감 없이 거짓을 양산하고 이를 소비한다. 더욱이 이 거짓이 ‘광속’의 인터넷을 만나면서 누구든 순식간에 매장시킬 수 있는 ‘공포사회’가 됐다.

얼마 전 들은 얘기가 가슴에 남는다.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에 관한 얘기다. 사람들은 대개 ‘다른 건 몰라도 이 계명만은 내가 지켰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만 살인이 아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말로 고사(枯死)시키는 것, 누군가의 사회적 관계를 권력으로 절단 내는 것, 그걸 보고도 침묵으로 방조하는 것, 그 모든 것이 살인이라는 내용이었다.

거짓 댓글과 무분별한 공감, 소셜미디어 공유 한 번이 누군가에겐 칼날이 될 수 있다. 손가락 ‘터치 한 번’의 엄중함을 깨달아야 함에도 그 모든 게 너무 쉬운 시대다. 오늘 하루, 우리는 몇 번의 살인을 저질렀는가.
 
임우선 정책사회부 기자 imsun@donga.com
#숙명여고#김상곤#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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