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서동일]에티와 에리 “남북도 종전선언 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9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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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일 카이로 특파원
서동일 카이로 특파원
이달 초 이집트 카이로의 한 지역에서 열린 커뮤니티 프로그램에 참석했었다. 중동·아프리카 국가에서 온 유학생과 사업가 등이 많이 참석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행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아이스 브레이킹(초면의 어색함을 푸는 것) 시간. 이집트에서 의대를 다니고 있다는 에티오피아 국적의 한 여성이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한국도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길 바랍니다. 우리도 오랜 전쟁을 끝냈습니다. 에티오피아에 평화가 시작됐고 모두가 기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가 자랑스럽습니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유럽에 의한 지배, 독립전쟁과 쿠데타, 기아와 가뭄, 테러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 국가들만큼 많은 상처를 가진 나라는 없다고 평소 생각해왔던 탓이다. 그동안 받아왔던 한국 관련 질문은 빠른 경제성장과 정보기술(IT), 케이팝 등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에티오피아 사람에게 ‘훈수 아닌 훈수’를 들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국경을 맞댄 동아프리카의 두 나라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사이의 전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때부터다. 양국은 1998년 전쟁을 시작한 지 20년 만에 ‘평화와 우정의 공동선언문’을 발표하며 종전을 선언했다. 양국을 잇는 땅과 하늘 길이 다시 열렸다. 에티오피아 내 에리트레아 대사관도 문을 열었다. 양국은 1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갈등과 아픔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달 11일 아비 아흐메드 에티오피아 총리와 아페웨르키 이사이아스 에리트레아 대통령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부레 지역에서 국경 개방식도 열었다.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이날 행사장 모습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돌무더기가 곳곳에 쌓여 있는 황폐한 길에서 수천 명의 시민과 군인들은 국기를 흔들며 평화를 맞았다. 에티오피아 총리가 “국경을 따라 주둔하던 양국 군대는 이제 20년 만에 각 캠프로 돌아간다. 국경 인근의 수많은 참호를 철거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평화의 첫걸음을 내디딘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동안 총성만 가득했던 국경 양쪽에서 기쁨의 환호성이 퍼졌다.

두 국가의 종전은 20년이란 전쟁의 세월이 무색할 만큼 순식간에 이뤄졌다. 7월 에리트레아 수도 아스마라에서 양국 정상은 회담 하루 만에 전쟁 종료 선언을 이끌어 냈다. 합의를 주도한 것은 에티오피아 총리. 군인 출신인 그는 전쟁의 참상을 현장에서 목격한 인물이다. 전쟁을 계속해도 나아지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정치에 직접 뛰어들었다. 국제 사회에서는 정치권력이 마음만 먹는다면 무의미한 전쟁을 얼마나 쉽게 끝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라는 평가도 나온다.

양국은 경제적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아프리카에서 나이지리아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에티오피아는 늘 가난에 허덕였다. 해외 투자를 유치하려 노력해도 전쟁에 따른 불안감은 늘 걸림돌이 됐다. 내륙 국가인 탓에 전쟁 발발 후 홍해로 닿는 길 대부분이 막혔다. 항구 교통량의 90%를 인근 아프리카 소국 지부티를 통해야 하는 불편함도 겪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전쟁을 끝낸 에티오피아가 올해 8%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에리트레아 역시 에티오피아의 보증을 받아 유엔 제재가 풀릴 기회를 얻었다. 에리트레아 정치권은 그동안 전쟁 중이란 이유로 ‘안보’를 내세우며 인권탄압을 벌여왔다. 억압적 통치 탓에 국제사회에서는 ‘아프리카의 북한’으로 불릴 정도였다. 정상국가로 국제 사회에 이름을 올리는 순간도 머지않아 보인다. 에리트레아 경제도 숨통이 트일 것으로 전망된다.

양국이 전면전을 벌인 것은 1998년 이후 약 2년 정도다. 2000년 이후엔 전쟁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양국 군대는 항상 대기 상태였고, 전쟁의 공포감이 국경과 양국 국민들의 생각을 늘 지배하고 있었다. 이제 두 나라는 전쟁도 평화도 아닌 상황을 끝냈다.

카이로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에게 ‘전쟁을 끝낸 기쁨’을 얘기해주고 싶었던 에티오피아 여성이 남북이 대치 중인 한반도 상황을 얼마나 자세히 알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동아프리카 두 국가의 전쟁 역사를 찾아보는 내내 기자의 눈에는 남북한의 상황이 겹쳐 보였다. 남과 북을 가르는 휴전선 양쪽이 환호성으로 가득 차는 날이 언제쯤 찾아올까.
 
서동일 카이로 특파원 dong@donga.com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아비 아흐메드#아페웨르키 이사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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