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승헌]내가 봤던 ‘보수’ 존 매케인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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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정치부장
이승헌 정치부장
방 벽을 휘감고 있는 대리석 조각이 한겨울 날씨만큼이나 차갑게 느껴졌다.

2015년 2월 4일 미국 워싱턴 의회 내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장. 애슈턴 카터 신임 국방장관이 인사 청문을 앞두고 있었다.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군인이 아닌 물리학 박사 출신 카터를 국방장관에 지명하자 의회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청문위원장은 집안이 3대째 해군 출신인 ‘전쟁 영웅’이자 야당인 공화당 소속 존 매케인 상원 군사위원장. 시작부터 독설이 난무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의사봉을 두드리며 그가 말했다.

“상원 군사위원회는 카터 박사가 그동안 보여준 국가에 대한 봉사와 이런 성과를 가능케 한 가족들의 희생에 감사를 표합니다. 오늘은 그의 직무수행에 대해 품격 있는 질문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귀를 의심했다. 오바마의 국방정책을 그토록 비난해 온 매케인이었다. 오전 내내 날카로운 질문은 있었지만 비아냥거림이나 신상 털기식 질문은 없었다. 잠시 정회. 뒤에 있다가 미국 기자들을 따라 매케인에게 다가갔다. 오바마와 맞붙었던 전직 대선 후보이자 워싱턴의 거물. 그런데 기자들은 팔짱을 끼며 질문했고 그도 웃으며 대답했다.

―왜 카터를 그냥 두는 건가요.

“대안 있나?”

―그건 정부가 고민할 몫 아닌가요.

“이봐, 내 나라이기도 하지. 몰랐어? 나 애국자야.(웃음) 이슬람국가(IS)와 전쟁을 하고 있는데 애시(카터의 예명) 정도면 오바마가 꺼낼 최상의 카드야.”

한국 정치 문화에 익숙한 기자에겐 너무 생소한 장면이었다.

2016년 9월 9일 그를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워싱턴 헤리티지재단에서 열린 ‘미국의 아시아 정책’ 특별좌담회. 매케인은 특별 게스트였다. 북한의 5차 핵실험 직후라 한국 기자인 나에게도 질문권이 주어졌다.

―최우선 대북제재는 무엇이어야 하나요. 한국에서 전술핵 재배치 등 핵무장론이 나오는데 미국은 여전히 수용 불가인가요.

“좋은 질문이네, 친구. 우선 두 번째 질문부터. 미국의 핵우산은 효과적이고 이를 바꿀 용의는 없어요.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인 친구들은 미국 핵우산에 만족하고 있어요. 그리고 대북제재는 결론부터 말하면 중국이 움직여야 해. 우리가 할 건 사실 별것 없어서 말이지.”

당시 들었을 땐 답답하게 느껴졌는데 2년이 지난 지금 물어봐도 같은 답 외엔 나올 게 없는 상황. 좌담회 후 잠시 따로 물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도 매케인은 내내 중국 역할론을 강조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24일(현지 시간) 중국이 제 역할을 안 한다며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을 취소해 버렸다. 한 분야에 천착한 고수의 혜안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 뒤로 몇 번 더 매케인을 접했지만 별세 소식을 듣고 유독 두 장면이 떠올랐다. 요새 찾기 힘든 보수의 품격과 경쟁력을 보여줬다는 게 비슷해서 그런 것 같다. 미 정가에선 ‘흔들림 없는’ ‘굳건한’이란 표현을 쓸 때 ‘unwavering’이란 말을 즐겨 쓰는데, 매케인은 이 표현이 참 잘 어울리는 정치인이었다. 국가에 대한 흔들림 없는 충성을 판단 기준으로 삼고, 전문 분야(군사)에 대한 흔들림 없이 깊고 넓은 콘텐츠를 갖추면서 높낮이에 상관없이 소통하고 유머 감각을 두루 갖춘 사람…. 그는 보수라면 흔히 떠올리는 웰빙족이나 스타일리스트와는 거리가 먼 ‘전사 정치인(warrior politician)’, 양복 입은 군인이었다.

매케인의 이런 미덕은 사실 국적과 무관한 것이기도 하다. 궤멸됐다는 평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한국 보수가 이번 기회에 매케인의 삶을 돌이켜보며 부활의 힌트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존 매케인#대북제재#미국 핵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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