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범석]‘슬램덩크 강백호’는 가고 ‘일장기와 자위대’가 온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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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석 도쿄 특파원
김범석 도쿄 특파원
일본 도쿄에서 남서쪽으로 약 60km 떨어진 곳에는 800년 역사의 고도(古都) 가마쿠라(鎌倉)시가 있다. 박물관과 노포(老鋪)들이 있는 가마쿠라역은 물론이고 일본 3대 불상 중 하나인 ‘가마쿠라 대불’이 있는 하세(長谷)역, 쇼난(湘南) 지역 대표 관광지 ‘에노시마(江の島)’의 입구인 에노시마역 등에는 관광객들이 몰린다.

이곳에는 ‘가마쿠라 고교 앞’이라는 뜻의 가마쿠라고코마에(鎌倉高校前)역도 있다. 복선도 아닌 단선인 데다가 출입구는 달랑 한 곳, 역무원도 없는 초라한 간이역이다. 하지만 이 역의 이용 승객은 2016년 기준 73만 명을 넘었다. 간이역치고는 이용률이 높은 편이다. 주말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때도 있다.

이 역에 내리면 희한한 광경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승객이 역 바로 앞 건널목에서 열차가 지나갈 때마다 사진을 찍는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1990년대 초 인기를 얻었던 일본 애니메이션 ‘슬램덩크’의 팬이라는 것이다. 농구를 소재로 10대들의 도전과 열정을 그려 낸 이 작품은 당시 한국에서도 ‘농구대잔치’ 붐과 맞물려 인기를 얻었다. 이들이 사진을 찍는 곳은 주인공 강백호가 건널목에서 여주인공을 기다린 장소로 유명하다. 건널목 하나뿐인 이곳에서 한국어, 중국어, 영어 등 다국적 언어가 쉼 없이 들린다. 가끔 ‘히잡’을 쓴 아랍인도 보인다.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그가 ‘강백호 건널목’까지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문화의 힘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한국에서도 일본 문화가 한때 주목을 받았던 때가 있었다. 1980∼1990년대, ‘안젠치타이(安全地帶)’, ‘엑스저팬’ 등 당시 일본 밴드들의 복제 음반, 소위 ‘빽 판’을 사려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를 기웃거렸던 한국 청춘들이 있었다. 게임, 만화 등도 어떻게든 구해서 즐겼던 때였다.

세계에서 인기를 얻었던 일본 문화는 현재 뜻밖의 길에 들어섰다. 최근 4인조 록 밴드 ‘래드윔프스’의 신곡 ‘히노마루(일장기)’ 가사에는 ‘두근거리는 피, 자랑스럽게/이 몸에 흐르는 것은 고귀한 이 제국과 영혼/자, 가자! 해가 뜨는 나라의 일왕 곁으로’ 같은 군국주의 군가를 연상케 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포크 듀오 ‘유즈’도 가사에 ‘야스쿠니신사’ 같은 민감한 내용을 담은 노래를 발표해 논란을 빚었다.

최근 한국의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한 일본의 톱 아이돌 그룹 ‘AKB48’도 3년 전 콘서트에서 일본의 미국 하와이 진주만 공습 장면을 배경 사진으로 사용한 사실이 알려졌다. 한 멤버는 오디션 프로그램 출연 직전에 일본 자위대 잡지의 표지 모델로 활동하는 등 우익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항공 자위대를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일본군 군함이 소녀로 의인화돼 전쟁을 벌이는 게임 등 우경화 현상이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

25일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지지하는 18∼29세의 비율은 45%로 나타났다. 몇 년 전부터 아베 총리의 지지율이 가장 높은 연령대가 10, 20대다. 이런 ‘젊은 보수’의 입맛에 맞는 문화 콘텐츠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 대신 탄탄한 구성력이나 기발한 아이디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정서 등 예전 일본 문화 콘텐츠의 강점들은 옅어지고 있다.

제2, 제3의 ‘강백호 건널목’이 나올 확률이 점점 더 낮아지고 있다.
 
김범석 도쿄 특파원 bsism@donga.com
#군국주의#akb48#강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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