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승헌]CIA와 정찰총국 사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10일 03시 00분


코멘트
이승헌 정치부장
이승헌 정치부장
“처음 뵙습니다만, 참 익숙한 목소리네요.”

얼마 전 한 여성 중진 의원은 처음 보는 중년 남성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자신이 방송에 자주 출연해 익숙한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자신의 목소리를 ‘감시’ 차원에서 자주 들어 익숙하다는 말이었단다.

이 남성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북핵 정보 업무를 총괄하는 앤드루 김 한국임무센터장. 정치권 관계자는 “앤드루 김이 CIA 사무실 못지않게 한국 사무실에 더 자주 간다고 한다”고 전했다.

북한 김정은의 신년사로 시작된 한반도 대화 모멘텀을 맞은 지 오늘로 딱 100일. 그 사이 많은 게 변했다. 그중 하나가 미국과 북한의 정보기관이 한반도에서 공공연히 활개 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봐서 그렇지 CIA는 어떤 조직보다 보안을 중시한다. 미 버지니아주 랭글리에 있는 CIA 본관 진입로 초입에 주정차라도 할 경우엔 기관총을 든 경비원들로부터 “여기는 은밀한 정부기관(clandestine agency)입니다”라는 경고를 듣는다. 그런 CIA 간부들이 요즘 수시로 광화문으로, 여의도로 향하는 것이다.

북한 전현직 정찰총국 인사들은 위장도 변장도 하지 않은 채 버젓이 한국 언론에 등장한다. 김영철 북한 통일전선부장이자 전 정찰총국장은 2일 우리 예술단의 평양 공연을 취재하는 기자단을 찾아가 “천안함 폭침 주범이라는 사람이 저 김영철입니다”라고 했다. 2월 평창 올림픽 폐회식 참석차 방한했을 때 천안함에 대해 한마디도 않던 그였다. 그런 김영철은 당시 동행했던 김상균 국가정보원 2차장을 친구인 양 “상균 선생”이라고 불렀고, 평양 공연이 끝나자 그의 손을 붙잡고 노래를 불렀다.

이런 상황에서 CIA와 정찰총국 라인이 북-미 정상회담을 위해 수차례 기밀 접촉했다는 외신보도는 어찌 보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다. 정보기관들의 활동이 이 정도로 포착되니 드러나지 않은 활동은 더 많을 것이다. 북-미가 서로 간을 보는 수준을 넘어 정보라인을 전면에 내세워 정보전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북-미 정보라인은 판을 치고 있는데 국정원은 어디 있느냐는 말을 주변에서 종종 듣는다. 아주 근거 없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지난달 27일 오전. 전날 밤 김정은이 특별열차를 타고 중국 베이징을 방문했다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이날 오전까지 정부는 김정은이라고 확인하지 않았다. 처음엔 알면서도 보안 때문에 입을 닫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오후 들어서도 대북 정보에 정통한 여야 의원들이 국정원 정보라며 “김정은이 아니라 김여정”이라고 잇따라 밝혔다. CNN이 “김정은이 확실하다”고 속보를 내던 시점이었다. 국정원이 몰랐거나 상황 관리를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인데, 여야 공히 ‘김여정’이라고 한 것을 보면 늦게 알았다는 평가가 더 많다. 청와대도 이날 오전까지 긴가민가했다는 말이 돌았다.

국정원이 지금 CIA, 정찰총국처럼 대놓고 활개 치란 건 아니다. 오히려 조용히 할 일을 하는 게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다만 미증유의 안보 상황인 만큼 국정원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지 우려하는 시선도 있는 게 사실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는 적폐청산 차원에서 국정원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옮기고 이름은 무슨 싱크탱크를 연상케 하는 대외안보정보원으로 개편하려던 참이었다. 북핵 이슈가 중대 분수령을 맞는 올해만큼은 국정원을 길들이거나 뜯어고치기보단 정보기관으로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게 CIA와 정찰총국 틈바구니에서 존재감을 찾고 국익에 기여하는 길이 아닐까 싶다.
 
이승헌 정치부장 ddr@donga.com


#cia#앤드루 김 한국임무센터장#정찰총국#김영철 통일전선부장#국정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