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철희]기립 박수에만 손짓하는 정치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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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논설위원
이철희 논설위원
그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연두 국정연설을 보면서 혹시 프롬프터가 고장 난 것 아닌가 했다. 트럼프가 시종 왼쪽만 바라보고 연설문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립 박수를 쏟아내는 공화당 의원 쪽으로 아예 몸을 틀어 함께 박수 치고 손짓하기까지 했다. 사안에 따라 일부 박수 소리도 나왔지만 냉담하기만 한 민주당 의원 쪽은 차라리 무시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아니, 트럼프라면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자연스러운 행동일 것이다.

○On-Off뿐인 ‘트럼프 머신’


트럼프의 정신건강 논란을 낳은 화제의 책 ‘화염과 분노’(마이클 울프)에는 과대망상과 집중력 장애, 공감능력 결핍, 심지어 독살에 대한 공포까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충격적인 에피소드들로 가득하다. 국정 운영 경험이라곤 전혀 없는 트럼프지만 보고서를 읽는 것도 브리핑을 듣는 것도 질색한다. 거기에 같은 말, 같은 표현을 수없이 되풀이한다니 치매 증세 아니냐는 논란이 불거질 만도 하다.

한때 트럼프의 복심이었던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는 트럼프를 ‘온(On)-오프(Off) 두 기능만 있는 아주 단순한 기계’라고 묘사한다. 온 스위치가 켜지면 어떤 굴욕도 마다하지 않는 최상급 아부가 넘쳐흐르고, 오프 스위치에선 격렬히 분개하며 중상모략을 쏟아 놓는다는 것이다. 이익이 될 것 같다면 어떤 칭찬도 아끼지 않고, 그게 아니라면 온갖 경멸과 함께 소송도 불사하는 장사꾼 기질에서 비롯됐으리라.


하지만 이런 트럼프의 단순 이분법 사고방식은 지난 대선에서 탁월한 선거 전략으로 위력을 발휘했다. 공화-민주 양당 대결구도에서 ‘미국 최우선’을 외치며 백인 중하층의 불만을 건드렸고 열광적 지지를 이끌어냈다. 뻔히 예상되는 패배에 ‘승리를 도둑맞았다’고 외칠 준비만 하고 있던 트럼프 진영엔 난데없는 승리라는 기적이 일어났지만, 트럼프는 금세 ‘이건 기적이 아니라 내가 이룬 성취’라는 자기최면에 빠져들었다.

흔히 대업을 이룬 대통령의 선거전을 보면 우선 당내 경선에선 자신의 이념적 지향을 분명히 드러내며 차이를 강조한다. 핵심 지지층을 다지기 위해서다. 하지만 일단 후보가 되면 지지 기반을 넓히기 위해 좀 더 중간지대로 다가가고, 선거 승리 후엔 사회 통합과 단결을 추구한다. 그러다 보면 집권 후 핵심 지지층 사이에서도 볼멘소리가 나오기 마련이다.

물론 트럼프 역시 나름 변신의 제스처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뼛속까지 ‘나는 트럼프일 뿐’인 그가 대통령이 됐다고 해서 달라질 수는 없었다. ‘이익 아니면 손해’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트럼프 정치는 그대로 이어졌다. 그러니 그가 국정연설에서 “차이점은 접어두고 공통점을 모색하자”며 초당적 협치를 외친들 야당이 호응할 리 없다.

○‘촛불’ 기대는 文은 다른가


우리라고 다른가. 문재인 정부는 출범 이후 국민통합을 내세웠지만 여전히 대선 때 내건 공약 기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 비정규직, 저임금, 청년실업 등 노동시장 개혁 같은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해법이 필요한 사안들마저 비정규직 제로화, 최저임금 인상, 공무원 증원 등 단기적인 대증요법으로 풀려 한다.

자연 곳곳에서 불만의 소리가 나온다. 그러자 정부는 다시 핵심 지지층에 기댄다. 남북 해빙 기류에 역풍이 불자 문재인 대통령은 “바람 앞에 촛불을 지키듯 남북대화를 지키고 키우는 데 힘을 모아 달라”고 호소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지만 과했다. 남북관계마저 박수 치는 한쪽만 바라봐선 안 된다. 미국 정치의 분열과 혼란, 남의 일이 아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화염과 분노#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문재인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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