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용석]기업에 중국만큼의 자유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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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산업1부 차장
김용석 산업1부 차장
김정주 넥슨(NXC) 회장이 스마트폰을 열어 문자메시지를 보여준 적이 있다. 김범수 카카오톡 의장이 보낸 문자였다. 요지는 이러저러한 조건으로 얼마를 투자해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김 회장은 문자 서너 통에 투자를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카카오톡 초기 투자자 중 한 사람이 됐다. “세상에 이렇게 쉽게 투자를 받아가는 사람이 어디에 있답니까. 그 흔한 파워포인트 문서 하나 안 보여주고 말예요. 황당하죠.” 김 회장은 농담 삼아 얘기를 꺼냈지만, 거기에서 벤처 활성화의 중요한 단초 하나를 발견했다.

벤처 강국이라는 이스라엘에 갔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곳 창업가들은 정말 어마어마한 자신감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 바탕에는 ‘뛰어난 아이디어라면 언제 어디서든 투자를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었다. 첫 번째는 망했지만 두 번째 창업에서 돈을 많이 벌었다는 한 연쇄 창업가(Serial entrepreneur)를 만났다. “세 번째 창업 땐 돈 걱정 없었겠다”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주 일부만 투자했습니다. 외부 투자를 못 받고 내 돈으로 채우는 건 그만큼 사업 아이디어가 안 좋다는 뜻이잖아요.”

카카오톡이나 이스라엘 벤처들은 삭막한 모래땅에 뿌리 내린 민들레 같은 존재가 아니다. 탄탄한 창업가 인맥과 전 세계 유대계 자본이라는 비옥한 생태계 없이는 키우기 힘든 귀한 화초에 가깝다. 이들의 재능과 노력을 낮춰 보는 게 아니다. 그만큼 기업과 기술, 인재를 성장시키는 생태계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기업이든 국가든 이런 생태계의 일원이 되는 것은 이제 성공의 조건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 됐다. 언제 어떤 스타트업과 기술기업이 기존 가치를 파괴하는 혁신 기술을 만들지 모른다. 이들과 공생하며 언제든 실탄(현금)을 쏴 내 것으로 만드는(남에게 가는 것을 막는) ‘투자 전쟁’에 돌입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가진 사업의 가치가 언제 폭락할지 가늠할 수 없다. 마치 포커 게임을 할 때 상대방의 패를 전혀 보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난해 말, 삼성전자가 사들인 글로벌 스타트업과 기업이 하나도 없었다는 조사 결과에 섬뜩한 기분이 들었던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조사 결과가 나온 날 이재용 부회장은 법정에 서 있었다. 15조 원을 투자하는 과정에서 삼성이 정부에 청탁했을 것이라는 특별검사의 주장에 이 부회장은 “그런 정도 투자를 할 땐 세계 어느 정부든 우리에게 청탁을 하지 우리가 청탁할 일은 아닌 것 같다”고 반박했다.

검사의 질문엔 ‘투자는 기업의 일이고, 허락(허가)은 관(官)의 일’이라는 옛날 고정관념이 진하게 배어 있다. 허가권을 쥔 관의 뒤떨어진 인식은 종종 기업의 자유로운 투자 의지를 꺾는다. 예컨대 채팅 로봇을 활용한 자산관리 상담 서비스를 내놓으려는 기업에 면대면 고객 상담을 하는 매장을 만들라고 한다는 게 현재 한국 규제 당국의 현실이다.

이런 답답함과 척박함에 대해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등 경제단체 수장들은 새해 첫머리부터 “한국의 기업 투자환경은 중국보다 더 자유롭지 못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오죽하면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과 비교했을까. 드론, 헬스케어 등 우리가 규제에 막혀 있는 분야에서 중국은 창업이 번창하고 있다. 한국은행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1만 명당 신설 기업 수는 중국(32개)이 한국(15개)의 2배가 넘었다. 이 땅의 기업시민들에게 중국만큼의 자유라도 허락해줘야 한다.
 
김용석 산업1부 차장 yong@donga.com
#벤처 강국 이스라엘#김정주 넥슨 회장#한국의 기업 투자환경#중국의 창업 번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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