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철희]‘1987’ 이듬해, 그리고 30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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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논설위원
이철희 논설위원
다음 주 개봉하는 영화 ‘1987’은 많은 사람들을 새삼 깊은 감회에 젖게 만들 것이다. 영화가 그린 그곳, 그 순간 하나하나는 누구나 가슴 한편에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물고문을 받아, 최루탄에 맞아 죽어가던 가혹한 시대였다. 국민의 분노가 무지막지한 권력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게 거리로 나선 국민의 힘은 끝내 권력을 무릎 꿇게 만들었다. 여기까지는 영화 속 이야기다.

국가大事 올림픽의 역설

1987년 6월 전두환 정권은 시위진압을 위한 군 병력 출동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 7년 전 광주의 비극을 통해 권력을 잡은 군사정권이다. 그런데 시위대에 굴복했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병력 출동 준비는 극한 세력에게 경고를 보내는 동시에 노태우에게 대통령직선제 수용을 촉구하는 양동전술 차원이었을 뿐 애초부터 위수령이나 계엄령 같은 비상수단을 쓸 생각이 없었다고 강변했다. 과연 그럴까. 그가 병력 출동 중지 지시를 내린 것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한 주한 미국대사를 만난 직후였다.

미국 외에도 국제사회의 압박은 전두환 정권이 무자비한 시위 진압을 자제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당시 전 세계의 이목은 온통 한국에 쏠려 있었다. 이듬해 열릴 서울 올림픽 때문이었다. 끓어오르던 민심에 기름을 부은 4·13 호헌 조치의 구실도 ‘서울 올림픽이라는 국가 대사’를 앞두고 있어서였고, 그것을 철회한 이유도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위해서였다. 이미 국제사회에선 올림픽 개최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아예 취소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중재로 북한의 올림픽 참가, 아니 공동개최 협상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북한은 개최 종목의 동등한 배분과 TV중계료 수입 배분까지 요구했다. 동서 진영의 보이콧으로 두 차례나 반쪽으로 치러진 올림픽의 온전한 개최를 위한, 테러의 위협으로부터 대회를 보존하기 위한 협상이었다. 보이콧을 선동하는 북한을 가능한 한 오래 붙잡아두며 돌출행동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결국 2년여에 걸친 실랑이 끝에 북한은 철저히 고립됐고, 서울 올림픽은 160개국이 참여한 역대 최대 규모로 치러졌다.

한국 입장에선 서울 올림픽은 성공 그 이상이었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이 확연히 달라졌고, 특히 남북 간 체제 경쟁에서 북한을 완전히 따돌렸다. 노태우의 북방정책도 그 시작은 서울 올림픽이었다. 올림픽 개막 나흘 전 발표된 헝가리와의 외교관계 수립을 시작으로 공산권 국가와의 수교가 이어졌다. 한편으로 서울 올림픽은 북-미 간 직접 대화가 처음으로 이뤄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위기관리에 成敗 달렸다

한국에서 다시 올림픽이 열린다. 30년 전과는 확연히 다른 상황이지만 여전히 북한은 평창 올림픽의 큰 장애물이다. 우리 정부가 그렇게도 애원하다시피 하지만 북한은 참가도, 불참도 밝히지 않은 채 밀고 당기기를 계속하고 있다.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북한은 더욱 기고만장해졌고, 미국은 ‘강제적 비핵화’를 내세워 북한을 더욱 몰아붙이고 있다.

미국이 북핵 해결의 데드라인으로 잡았다는 내년 3월, 평창 패럴림픽이 끝날 때까지 한반도는 순간순간 위기의 연속일 수 있다. 한국은 엄청난 중압감 속에 선택을 강요당할 것이다.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위기의 순간을 잘 관리해야 한다. 평창의 성공은 여기에 달렸다. 그래서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위기는 어느덧 기회로 바뀌어 있을 수도 있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
#영화 1987#전두환 정권 시위진압#미국의 북핵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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