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정순훈]왕의 사과와 대통령 담화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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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훈 원세·방세연구소 대표
정순훈 원세·방세연구소 대표
중국 왕조시대에는 황제가 잘못을 해도 그 누구도 처벌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황제도 스스로를 꾸짖는 ‘죄기조(罪己詔)’라는 조서를 내렸다. 조정에 문제가 생기거나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정권의 위기가 닥쳤을 때 황제도 백성들에게 “내 탓이로소이다”를 밝혔다. 죄기조를 처음 발표한 한문제(漢文帝)는 덕이 높고 사리분별이 명확해 명군으로 꼽힌다.

기원전 179년을 시작으로 약 2095년 동안 중국에서 89명의 황제가 죄기조를 내렸다. 당 태종 등 명군일수록 죄기조를 많이 썼다. 당 태종은 개국 공신 당인홍(黨仁弘)이 뇌물을 받은 것이 드러나자 그의 죽음을 면하게 하는 대신 죄기조를 내렸다. 그러면서 “사사로운 정으로 천하의 믿음을 저버렸고, 스스로 법을 어지럽혔다”며 황제 스스로 교외로 나가 돗자리를 깔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며 사흘 동안 하늘을 향해 사죄했다. 그만큼 민심과의 소통을 의식했던 것이다.

지도자가 자성하는 이 전통은 우리나라에도 들어왔다. 조선의 성군인 세종대왕은 자연재해로 ‘죄기서(罪己書)’를 내렸고, 임진왜란을 당한 선조 등도 내렸다. 지방 관청마다 걸린 ‘죄기서’를 통해 국민은 위안을 받고, 임금은 심기일전해 국정을 이끌었다. 죄기서는 임금의 반성이자 참회요, 개혁과 미래를 담은 글이었다. 왕조시대에도 임금은 마음을 담은 죄기서로 민심을 어루만졌다.

세월호 참사로 박근혜 대통령이 여섯 번이나 사과를 하며, 담화를 발표했다. 지도자가 잘못을 인정하면 위신과 이미지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오히려 때를 놓친 사과가 문제가 됐다.

박 대통령을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대통령이 그토록 믿었던 관료와 청와대 비서진 탓이 크다. 그들은 책임지는 일이 두려워 사고 대처에 발 벗고 나서지 않았고, 민심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해 대통령이 제대로 된 사과를 할 수 없게 했다.

민심의 바다는 지도자를 띄우기도 하지만 가라앉게도 한다. 민심을 수습하고 정부를 쇄신하기 위해 지금은 거국내각과 비서실 일신 등 그야말로 ‘창조적 인사’가 필요한 때다.

박 대통령은 저서에서 ‘결국 한 줌, 결국 한 점’이라고 했다. 권력도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업적과 뜻’이다. 대통령은 그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얻고, 강물은 강을 떠나야 바다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이 담화문 외에도 ‘죄기서’를 발표해 후세의 귀감이 됐으면 한다. 민심을 제대로 수용할 때 지도자는 빛난다. 304명의 가슴 아픈 희생자 이름을 안고, 세월호 조사는 철저한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그래야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는다. 세월호 참극은 세월이 흘러도 ‘안전한 대한민국’으로 가는 ‘잊혀지지 않는 교훈’으로 남아야 한다.

정순훈 원세·방세연구소 대표
#지도자#민심#대통령#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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