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정미경]내년 활짝 갠 미국 정치를 기대하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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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 워싱턴특파원
정미경 워싱턴특파원
요즘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보니 산타클로스 얘기가 자주 등장한다. 얼마 전 동네 백화점에 갔다가 흥미로운 광경을 봤다. 산타와 사진 찍는 코너에 백인 산타와 흑인 산타 모델이 동시에 대기하고 있었다. 대개 백인 산타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 백화점은 소수인종을 고려해 흑인 산타도 등장시킨 것. 아이들에게 백인 산타와 흑인 산타 중에 골라서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한 배려는 신선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어린아이들에게까지 인종적 다양성을 강요해야 하나’ 하는 씁쓸한 기분도 들었다.

집에 와서 TV를 켜니 산타 논쟁이 한창이었다. 얼마 전 보수 성향의 폭스TV 앵커가 “산타가 백인이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한 후 미국에서는 산타 논쟁이 불붙었다. 토론 프로그램에서는 “산타는 백인 남성”이라는 보수주의자와 “산타는 소수인종 출신”이라는 진보주의자가 역사 종교 전문가를 동원해 산타 인종을 밝혀내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산타 인종 논란은 종종 있었지만 올해는 더욱 뜨겁다. 산타 할아버지조차 보수 진보 갈등의 희생양이 됐다는 탄식의 목소리도 나온다.

산타뿐만이 아니다. 사소한 이슈도 이념 전쟁의 소재가 되면 미국을 떠들썩하게 하는 국가적 이슈가 된다. 토머스 피터슨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는 “1960년대 말 미국 사회운동 이후 사상적 대립이 지금처럼 극명하게 나타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갤럽 조사에 따르면 ‘사회 그룹 간 갈등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 응답은 73%에 달했다.

올해 미국 정치권을 보면서 가장 많이 접한 단어는 ‘정체(gridlock)’였다. 정치권은 갈등과 대립의 진원지였다. 미국의 유명 정치학자 클린턴 로시터는 미국의 공화 민주 양당 체제를 가리켜 “다른 나라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타협의 동물”이라고 높이 평가한 적이 있지만 요즘 미국 정치권을 보면 부러움의 대상도 타협의 동물도 아니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정치권은 점점 강경파에 의해 주도되고 있어 타협의 정치가 발붙일 곳이 더욱 줄어들고 있다. 특히 공화당의 분열은 ‘내전’ 수준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최근 공화당 지도부는 민주당과 타협해 예산안을 통과시키지 말라는 강경 보수파의 주문을 무시하고 예산안을 통과시켰다가 당내 티파티 세력으로부터 ‘선거 때 두고 보자’는 협박을 듣고 있다.

민주당도 빌 더블라지오 뉴욕시장,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등 진보 정치인의 치솟는 인기가 보여주듯 당내 권력은 급진 진보파에게로 쏠리고 있다. 최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최저임금 인상을 내걸고 빈부격차 해소를 자주 거론하는 것은 진보 세력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신년 국정 어젠다는 지금보다 훨씬 진보적 색채를 띨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미국 정치권에서 돈과 지지자는 이념 스펙트럼의 가운데가 아니라 양쪽 끝 정치인들에게 몰린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보수건 진보건 타협을 거부하는 강경파의 주장은 일반 국민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역사학자 대니얼 부어스틴이 말한 것처럼 국민은 천성적으로 극단주의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올 한 해 한국의 불통 정치 소식을 접하면서 미국 정치를 자주 들여다봤다. 그러나 민주주의 모델 국가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미국 정치는 별다른 교훈을 주지 못했다. 최근 뉴욕타임스는 내년 미국 정치 기상도를 ‘더욱 흐림’으로 내다봤다. 내년에는 미국 정치에 드리운 구름이 걷혀 활짝 갠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정미경 워싱턴특파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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