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90>녹슨 도끼의 시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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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도끼의 시
―손택수(1970∼)

예전의 독기가 없어 편해 보인다고들 하지만
날카로운 턱선이 목살에 묻혀버린
이 흐리멍텅이 어쩐지 쓸쓸하다
가만히 정지해 있다 단숨에 급소를 낚아채는 매부리처럼
불타는 쇠번개 소리 짝, 허공을 두 쪽으로 가르면
갓 뜬 회처럼 파들파들 긴장을 하던 공기들, 저미는 날에 묻어나던 생기들,
애인이었던 여자를 아내로 삼고부터
아무래도 내 생은 좀 심심해진 것 같다
꿈을 업으로 삼게 된 자의 비애란 자신을 여행할 수 없다는 것,
닦아도 닦아도 녹이 슨다는 것
녹을 품고 어떻게 녹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녹스는 순간들을 도끼눈을 뜬 채 바라볼 수 있을까
혼자 있을 때면 이얍 어깨 위로 그 옛날 천둥 기합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오기도 하는 것인데, 피시식
알아서 눈치껏 소리 죽인 기합 소리는 맥이 빠져 있기 마련이다
한번이라도 꽉 짜인 살과 살 사이의 틈에 제 몸을 끼워 맞추고
누군가를 단숨에 관통해 본 자들은 알리라
나무는 저를 짜갠 도끼날에 향을 묻힌다
도끼는 갈고 갈아도 지워지지 않는 묵향을 그리워하며 기꺼이 흙이 된다
뒤꿈치 굳은살 같은 날들 먼지 비듬이라도 날리면
온몸이 근질거려 번쩍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고 싶은 도끼

독기(毒氣)는 기운(氣運)인데 녹이 슬겠나. 독기가 아니라 도끼로구나. ‘독기’와 ‘도끼’가 같은 발음인 데 착안한 말장난(pun)이다. 화자는 성격이 단호하고 기세등등한 사람이었나 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유순하고 온화해졌다. 그게 얼굴에 다 나타난다. 곱게 나이 들어간 증표다. 그런데 화자는 문득 그 변화가 쓸쓸하다. ‘날카로운 턱선이 목살에 묻혀버린/흐리멍텅’으로 느껴진다. 턱선이 살아 있으면 여자는 브이(V) 라인, 남자는 사각턱이다. 사각턱은 남자의 강건미를 나타낸다. 나이가 들면 그 각이 무너져 둥글둥글해진다. 다들 편해 보인다지만 본인은 서글프다. 더욱이 시인이 이리 둥글둥글해서야 쓰겠나. 시무룩해지는 화자다. ‘꿈을 업으로 삼게 된 자의 비애’가 새삼 처연하다. 예술이 업(業), 즉 밥벌이가 돼 버리면, 원고료가 얼마냐, 언제 주냐, 뭐 이러고 살게 되면, ‘자신을 여행할 수 없다’. 상상의 날개를 펴고 예술에 매진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예술의 도끼에 녹이 슬어 무뎌지는 것이다. 시인이여 너무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말자. 독기와 독기가 수그러듦, 이 둘을 아우르면서 당신은 더 강해지리. 나이 든 자의 지혜와 힘으로.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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