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허진석]‘스노든 활극’서 빠져 있는 ‘조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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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국제부 차장
허진석 국제부 차장
주인공은 ‘엄청난 폭로’로 세계를 놀라게 하고 미국 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보복을 피해 은신처를 찾아다니다 몇 주 만에 겨우 구했다. 이제 다음 장면은 그가 강대국의 눈과 귀를 피해 은신처로 안전하게 가는 과정이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들이 연신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9일 시작했으니 한 달째 이어지는 ‘첩보물’이다. 영화 같은 요소는 다 갖췄다. 주인공은 에드워드 스노든(30). 전직 미국 중앙정보국(CIA) 직원으로 자신의 암호명은 ‘베락스’(verax·‘진실한’이라는 뜻의 라틴어)다. 비밀문건을 빼낸 뒤 근무지였던 하와이를 떠나 홍콩으로 숨어들었다. 이어 기자와 몰래 접선해 미 국가안보국(NSA)이 주축이 돼 내외국인을 가리지 않고 전화와 팩스 e메일 휴대전화 등을 광범위하게 감시·감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폭로했다.

후반부는 그를 잡기 위한 미국의 추격전이다. 러시아를 믿고 홍콩에서 출국했다가 러시아가 사실상 망명을 거부하자 현재 모스크바 환승구역 어딘가에서 숨어 지내고 있다. 21개국에 망명 의사를 타진하지만 초강대국 미국의 유무형의 압력 때문에 그를 받아주겠다는 나라는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 등 4개국뿐이다. 미국에서 추방당한 러시아 ‘미녀 스파이’ 안나 차프만(31)은 주인공에게 결혼을 제안하며 영화적 요소를 한층 더했다.

할리우드가 마케팅 차원에서 아시아 배우를 영화에 넣듯이 이 활극에는 한국도 등장한다. 2009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참석했다. 주인공의 폭로에는 영국의 3대 첩보기관인 정보통신본부(GCHQ)가 G20 정상회의 때 벌인 도청과 해킹 내용이 생생하게 나온다. GCHQ는 세계 각국 수뇌부의 통화 내용 및 인터넷 접속 내용을 불법으로 가로챘다. 행사장에는 인터넷 카페를 차려두고 이를 사용토록 유도한 뒤 미리 숨겨둔 스파이 프로그램으로 대표단의 아이디와 암호를 훔쳤다.

2010년 9월 작성된 문서에는 미국 워싱턴에 있는 38개국 대사관과 재외공관이 도청 ‘표적’으로 설정돼 있다. 유럽연합(EU) 영국 일본 멕시코와 함께 한국도 포함됐다. 공교롭게도 2010년 12월 초에 타결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가협상에서 미국은 자동차 부문에서 이전보다 더 많은 이득을 취했다.

감청을 당한 브라질에서는 대통령이 나서 항의 중이고 미국의 우방 독일도 미국 첩보기관을 기소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국가처럼 강력하게 항의를 하는 ‘한국 배우’는 아직 등장하지 않고 있다. 언론의 폭로 수준이니 믿지 못해서일까. 아니다. 미국은 폭로 내용 자체를 부인하진 않고 있다. 혈맹이니 우리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걸까. 한미 FTA 협상을 끈질기게 한 걸 보면 그 이유도 아닌 듯하다. ‘공공연한 비밀’이어서 새삼스러울 것이 없어서 그런가. 아니다. 짐작만 해오다 현장을 봤다면 도둑을 혼내는 것이 주인이 아니던가.

우리 외교부는 “지금까지 미국에 두 차례에 걸쳐 사실 확인을 요청했지만 11일 현재까지 미국 측의 답변은 없었다”고 정례 브리핑에서 밝혔다.

허진석 국제부 차장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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