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56>해수찜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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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찜
―노향림 (1942∼)

이따금 바다 갈매기들이 하얗게 똥을 떨어뜨린다.

그 똥이 훤히 올려다보이는 유리 천장 아래

상체를 내놓은 반라(半裸)의 여자들이 모여 찜질을 한다.

유황 성분에 바닷물을 끌어들여 만든 해수탕

질기고 비루한 일상을 벗어버리겠다고

바닥에 오체투지 하듯이 납작 엎드려 부항을 뜨거나

약쑥 냄새 자욱한 평상에 무릎관절 꺾고 앉아 있다.

만삭처럼 부른 배들을 스스럼없이 내놓고

뜨거운 열기 속에 얼굴들이 복숭앗빛으로 불콰하다.

더운 수증기에도 잘 젖지 않는 젖가슴들

한때 아기들에게 젖을 물렸을 자루처럼 늘어진 가슴 끝에

시든 꽃꼭지 같은 유두를 매달고 있다.

유난히 하복부가 나온 젊은 아낙이 통성명을 한다.

아따, 언니는 임신 팔 개월째여? 배만 징허게 나와부렀소.

삼십 대로 보이는 아낙이 저승꽃 핀 얼굴의

팔십이 넘어 보이는 늙은 아낙에게 말을 건다.

폐경기를 다 넘긴 여자들이 다시 회임했다고 깔깔댄다.

싸 온 도시락들을 나눠 먹으며 아따, 언니는 벌써 두 양푼째네.

요렇코럼 만수위 된 뱃속에 뭘 또 심고 싶소,

소나무 장작불 땐 해수탕에 와서 배 따땃하면 됐제.

그녀들은 유황 성분이 온몸에 녹아들었는지

불이 이는 홍조를 띠며 자매들처럼 앉아 있다.
솨솨솨솨솨, 바람소리나 쇄쇄쇄쇄쇄, 햇빛 쏟아지는 소리 들릴 듯 섬세하게 구축된 시각 이미지들을 슬며시 내보이는 게 내가 알고 있는 노향림 시인데 이 시는 완연 다르다. 왁자지껄 소리와 함께 여러 인물이 분주히 움직인다. 마치 정지시켜 놓았던 비디오가 갑자기 움직임에 돌입한 듯이. 추억처럼 아스라하고 쓸쓸한 노향림 시 특유의 아치도 근사하지만, 이 시의 불콰하고 후끈한 현장감도 썩 근사하다.

고갱의 그림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가 문득 겹쳐지는 반라의 여인들. 그러나 처녀의 긴장이 없어 그네들은 더 평화롭고 자유롭다. 자루처럼 늘어진 가슴과 만삭인 듯 불룩한 배를 하고 있지만 다들 마찬가지니까 부끄러움도, 질투도, 불만도 없다. 아이를 배고 낳고 기르고, 자기 몫의 ‘지루하고 비루한 일상을’ 살아내느라 삭신이 쑤시는 여인네들이 모처럼 편안하게 수다를 떨며 해수찜을 즐기는, 떳떳한 낙원!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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