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57>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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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김민정(1976∼)

만난 첫날부터 결혼하자던 한 남자에게
꼭 한 달 만에 차였다
헤어지자며 남자는 그랬다
너 그때 버스 터미널 지나오며 뭐라고 했지?
버스들이 밤이 되니 다 잠자러 오네 그랬어요
너 일부러 순진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두사부일체’ 보면서 한 번도 안 웃었지?
웃겨야 웃는데 한 번도 안 웃겨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잘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도미회 장식했던 장미꽃 다 씹어 먹었지?
싱싱하니 내버리기 아까워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이상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진정한 시의 달인 여기 계신 줄
예전엔 미처 몰랐으므로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사연 끝에 정중히
호(號) 하나 달아드리니 son of bitch
사전은 좀 찾아보셨나요? 누가 볼까
가래침으로 단단히 풀칠한 편지
남자는 뜯고 개자식은 물로 헹굴 때
비로소 나는 악마와 천사 놀이를 한다,
이 풍경의 한순간을 시 쓴답시고
한눈에 반한 여자건만, 그 여자 하필이면 시인이란 말인가! 순진하고 고상한 척하면서 하는 짓마다 이상한 여자, 그게 다 시 쓴답시고 그러는 거다! 그 머리에서 시를 박멸하고 어떻게든 사람 만들어 보려고 했건만 안 되겠구나. 그리하여 남자는 이별을 고하고 여자는 시를 쓴다. 잘 헤어졌네! 이건 코드 문제가 아니다. 시로 미루어 남자는, 허난설헌의 남편처럼, 독선적인 데다 옹졸하고 삐딱하다. 그 성격으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해피’, 그 옛날의 강아지들처럼 그 의식을 물고 놓지 못한다. 피해의식에 물려 있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인 것이다. 어이없고 분한 마음이 살짝 드러나면서, 장난기 느껴지는 명랑함이 번득이는 시다.

김민정의 시는 발칙할 정도로 발랄하다. 재미있는 시들이 많은데, 이 지면에 올리지 못할 시어들이 난무한다. 예컨대 남자 어른의 성기를 뜻하는, ‘ㅈ’으로 시작하는 우리말 같은. 그런 시어들을 볼 때마다 독자를 놀라게 하며 깔깔깔 웃는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남자여, 이런 게 그 여자의 시였답니다! 몰랐었지요?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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