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58>도봉근린공원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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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근린공원
―권혁웅(1967∼)

얼굴을 선캡과 마스크로 무장한 채
구십 도 각도로 팔을 뻗으며 다가오는 아낙들을 보면
인생이 무장강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동계적응훈련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대한 지 몇 년인데, 지갑은 집에 두고 왔는데,
우물쭈물하는 사이 윽박지르듯 지나쳐 간다
철봉 옆에는 허공을 걷는 사내들과
앉아서 제 몸을 들어 올리는 사내들이 있다 몇 갑자
내공을 들쳐 메고 무협지 밖으로 걸어 나온 자들이다
애먼 나무둥치에 몸을 비비는 저편 부부는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을 닮았다
영역표시를 해놓는 거다
신문지 위에 소주와 순대를 진설한 노인은
지금 막 주지육림에 들었다
개울물이 포석정처럼 노인을 중심으로 돈다
약수터에 놓인 빨간 플라스틱 바가지는 예쁘고
헤픈 처녀 같아서 뭇입이 지나간 참이다
나도 머뭇거리며 손잡이 쪽에 얼굴을 가져간다
제일 많이 혀를 탄 곳이다 방금 나는
웬 노파와 입을 맞췄다
맨발 지압로에는 볼일 급한 애완견이 먼저 지나갔고
음이온 산책로에는 보행기를 끄는 고목이 서 있으니
놀랍도다, 이 저녁의 평화는 왜 이리 분주한 것이며
요즘의 태평성대는 왜 이리 쓸쓸한 것이냐
그래, 맞아. 어쩜 이리 똑같을까! 시의 풍경이 눈에 선해서 키득키득 웃게 된다. 도봉구나 용산구나, 이 근린공원이나 저 근린공원이나. 철봉이나 역기 등의 운동기구랑 오두막 정자는 기본, 맨발 지압로랑 산책로가 있고, 약수터가 있다. 이용객들 모습도 닮았다. 우리는 근린공원에서 살뜰히 놀고 쉬고, 악착같이 체력을 다진다. 심상히 지나칠 법한 그 풍경을 시인은 잘도 꼼꼼히 들여다보고 생생히 그려 보인다. 문장과 문장을 이어주는 순발력이 여간 아니다. 예컨대, 약수터의 빨간 플라스틱 바가지를 보면서 대개 ‘께름칙하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바가지에 입을 댔을까’, 요 정도 생각에 그칠 텐데 시인은 즉각적으로 ‘헤픈 처녀’ ‘뭇입이 지나간 참’이라 짚어준다.

금연운동과 더불어 근린공원 신설이 대세. 비행기나 고속철도(KTX)를 타고 멀리 떠나지 못하는 대개의 서민들, 저녁마다 근린공원에 간다. 전투 치르듯 치열한 그 여가(餘暇)에 시인은 움찔하고, 어쩐지 쓸쓸하단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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