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용]크레타 섬의 유령 양 떼

  • Array
  • 입력 2013년 1월 8일 03시 00분


코멘트
박용 논설위원
박용 논설위원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최악의 경제난을 겪고 있는 그리스에서 벌어진 희한한 일을 소개한 적이 있다. 페타치즈로 유명한 그리스 크레타 섬에는 한때 ‘유령 양 떼’가 출몰했다. 유럽연합(EU) 정부의 보조금을 노린 가짜 양들이었다. 섬의 목축업자들은 가까운 사람들이 키우는 양을 모아 거대한 양 떼를 만들었다. 조사관이 나오면 양 떼를 집집마다 몰고 가서 보여주는 ‘양 떼 돌려 막기’로 보조금을 더 타먹었다.

국민의 일탈을 감시해야 할 국가 리더십은 부패와 비리로 작동을 멈췄다. 그리스에서는 운전면허를 따려고 해도 운전 강사와 시험 감독관에게 줄 ‘파켈라키’(작은 봉투라는 말로 촌지를 뜻함) 두 개를 들고 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각종 인허가에는 뇌물이 오갔다. 결국 지도층의 부패와 타락은 국민 전체의 도덕적 해이로 이어지고 국가 부도의 파국을 불러왔다. 그리스의 비극은 부패가 공공투자 정책을 왜곡하고 거래 비용을 늘려 민간의 투자 의지를 꺾고 경제를 나락에 빠뜨리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국의 청렴도가 그리스보다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놓고 큰소리칠 형편도 아니다. 국제투명성기구(TI)에 따르면 한국의 부패인식지수(CPI)는 지난해 조사 대상 176개국 중 45위(그리스는 94위)였다. 하지만 2년 연속 순위가 떨어졌다. 정권 말이 다가오면서 반(反)부패 의지가 퇴색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잇단 친인척과 측근 비리로 “억장이 무너진다”며 국민에게 사과했다. 검찰에서는 10억 원대 뇌물 검사, 여성 피의자와 검사실에서 성행위를 한 검사까지 나타나 국민에게 충격을 줬다. 힘 있는 기관일수록 청렴과 거리가 멀다는 부패의 법칙도 여전했다. 국민권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중앙행정기관 청렴도 평가의 꼴찌는 법무부였다. 수사, 단속, 규제를 담당하는 기관 중에서는 경찰청과 검찰청이 바닥을 기었다. 16개 시도교육청 중에는 가장 덩치가 큰 서울시교육청의 청렴도가 제일 나빴다.

새 정부가 들어서는 올해도 걱정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주무르는 각종 복지 예산이 사상 처음 100조 원을 넘어섰다. 100개가 넘는 복지 제도와 복잡한 복지 전달 체계를 정교하게 손질하지 않는다면 눈먼 돈이 생기고 재원이 줄줄 새서 도덕적 해이와 비리를 부를 수 있다. 경제민주화를 명분으로 쏟아내는 각종 법안이 시장과 기업 활동을 막는 규제로 변질될 수도 있다. 대기업의 경제력 남용과 시장의 실패를 바로잡겠다고 나선 정치권의 입김이 커질수록 부패와 비리의 유혹도 강해진다. 국회의원들은 선거 때 정치쇄신과 서민을 입에 달고 다녔지만 막상 총선, 대선이 끝나자 의원 연금과 세비 삭감, 면책·불체포 특권 내려놓기는 헌신짝처럼 버렸다. 그들이 외치는 경제민주화와 민생이 진정 서민을 위한 것인지, 재벌들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려는 ‘군기 잡기’인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청렴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정도만 돼도 성장률이 연평균 약 0.65%포인트 올라간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열 자식 굶기지 않겠다”며 민생 정치를 약속했다. 그러자면 지도층의 부패에 대한 불관용 원칙을 세우고 부패와 비리의 싹을 제대로 잘라내는 정치쇄신과 반부패의 로드맵부터 제시해야 한다. 정실(情實) 자본주의와 정경 유착의 부패 고리만 끊어도 국민이 그토록 바라는 경제민주화를 앞당기고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다.

박 당선인은 지난해 선거유세 기간에 “우리 정치의 고질적 문제인 패거리, 밀실, 권력투쟁, 부정부패 등도 여성 리더십으로 고치고 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약속이 지켜진다면 힘 있는 사람이 개혁을 비웃고, 민간 분야에서 ‘크레타의 유령 양 떼’가 어슬렁거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박용 논설위원 parky@donga.com
#경제난#부패인식지수#청렴도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