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촛불 참사’가 보여준 ‘보편적 복지’의 허구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1월 23일 03시 00분


전남 고흥군의 시골집에서 여섯 살 외손자와 사는 노부부가 전등을 켜지 않고 지낸 것이 벌써 3주째였다. 5월부터 6개월간 전기요금 15만7740원이 밀리자 한국전력이 10월 30일 집에 ‘전류제한기’를 달아놓았다. 단전(斷電) 대상 저소득 가구에 설치하는 전류제한기는 전기 사용을 제한하는 장치다. 전기 소모가 큰 제품은 못 써도 전등 냉장고 TV 정도는 쓸 수 있으나 부부는 전기가 끊긴 것으로 오인한 듯 밤마다 촛불을 켜고 지냈다.

쌀쌀한 날씨 탓에 이불을 겹겹이 덮고 잠을 청했던 조손(祖孫) 가족에게 비극이 닥친 것은 그제 새벽이었다. 오줌 마렵다고 칭얼대는 손자를 돌보느라 촛불을 켜고 그대로 잠이 든 뒤 양초가 쓰러져 불이 났다. 휴대전화도 없고 집 전화도 요금 미납으로 발신정지 상태였다. 할아버지는 119에 신고하러 허둥지둥 달려 나갔고, 불 끈다고 남았던 할머니는 손자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어려운 형편의 딸 대신 외손자를 보살피던 부부는 이런저런 이유로 기초생활수급자 지원도 받지 못했다. 이들의 안타까운 죽음은 허술한 복지정책의 현주소를 돌아보게 한다.

올해 대선에서 복지 문제가 부각되면서 후보들은 앞다투어 보편적 복지의 확대를 내세웠다. 자녀 양육에서 교육, 노후 보장까지 나라가 다 떠맡을 듯이 허풍을 친다. ‘무상급식’ ‘무상보육’ 등 무상 시리즈 봇물이 터지면 복지재정은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예산과 재원이 한정된 상태에서 복지지출은 우선순위에 따라 집행돼야 한다. 많은 복지 및 정책 전문가들은 최저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운 가정에 대해 국가가 생계나 의료 등을 보장하는 ‘공공부조’를 최우선 복지정책으로 꼽는다. 당장 전기요금조차 낼 수 없어 촛불을 켜고 살았던 이 조손 가족이 대표적 예다.

저소득 가구의 비극도 막지 못한 정치가 중산층까지 사회서비스를 확대하겠다는 식의 무상복지를 말하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하다. 강봉균 건전재정포럼 대표(전 재정경제부 장관)는 “보편적 복지를 확대하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 놓으면 재정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11월 현재 전류제한기가 부착된 집은 6777가구에 이른다. 겨울이 오면 연탄 한 장이 아쉬운 저소득층을 위해 정부가 지원하는 연탄 쿠폰은 필요한 양의 절반 수준이다. 정치권은 복지 확대 경쟁을 벌이기에 앞서 빈곤층 장애인 실업자 노인 등 취약 계층이 놓인 현실을 정확히 들여다보기 바란다. 정치인들이 보편적 복지로 표를 구걸할수록 힘겹게 살아가는 소외된 이웃의 절망은 깊어간다. ‘촛불 참사’ 같은 비극이 더는 없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지다.
#보편적 복지#저소득 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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