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철주의 ‘삶과 죽음 이야기’]<12>“시대는 변하는데 의사는 왜 안 변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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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1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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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철주 칼럼니스트
최철주 칼럼니스트
그동안 칼럼을 읽은 독자들에게서 e메일이나 전화를 많이 받았다. 심신이 지친 환자를 위로할 방법이 없느냐고 묻는 환자나 보호자가 꽤 있었다. 그런데 말투가 다소 시비조였다. 가슴에 맺힌 사연들이 풀리지 않은 탓이라 생각했다.

이 중 몇 명의 길고 긴 하소연을 요약하면, 텔레비전에도 소개되는 이른바 명의(名醫)를 찾아가 가족이 치료를 받을 때 삭막한 분위기에 너무 깊은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방송에 나왔을 때의 명의의 표정과 진찰실에서 마주친 그의 얼굴이 딴판이어서 이게 뭐가 잘못된 것 아닌가 하며 어리둥절했고, 막상 치료에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을 때 의사는 시원한 답변 한번 없이 컴퓨터 모니터에 얼굴을 묻고 있는 풍경에 질렸단다. “아니, 의사가 왜 그리 무표정해요? 꼭 컴퓨터만 보는 로봇 같아요”라는 항의성 문장을 읽어 내려갈 때쯤 나는 몸이 더워지는 것을 느낀다.

데이터 체크하며 환자얼굴 안봐

10여 일 전에 남편을 떠나보낸 50대 여성의 e메일 문장에는 분노가 배어 있다. “시대는 변하고 있는데 의사는 왜 변하지 않나요. 환자의 목소리도 반영되어야 하지 않나요. 어찌해서 의사들은 자기들 판단대로 수술하고 또 수술해야 되나요. 사람이 실험용 쥐인가요?” 성별이 분명치 않은 다른 독자의 짤막한 글은 이렇게 되어 있다. “수술을 많이 해야 명의로 가는 길이 됩니까?”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이름난 의사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온몸의 신경이 쪼그라드는 초긴장성 신경위축증이 있다. 그런 병명이 실제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모른다. 내 증상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단어를 나열한 것뿐이다. 생전의 아내를 병원에 데리고 다닐 때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아내에게서 전염되었다.

아내는 이름 있는 종양내과 의사의 진찰을 받을 때마다 몸살을 앓았다. 하루 전부터 잠을 설치고 다음 날 아침에는 식사도 거른 채 병원을 찾았다. 구토증상이 나타날까 걱정해서였다. 환자가 진찰실에 들어가거나 나가거나 상관없이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는 주치의의 고정된 자세와 석고상 같은 얼굴, 미동도 하지 않는 눈동자를 보면서 아내와 나는 몸이 굳어졌다. 심판대에 앉은 죄수의 심정이 그럴지도 모른다. 의사는 각종 검사 데이터를 체크하더니 “이제 여기는 더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무슨 말씀인가요?” 내가 물었다. 주치의는 “자세한 것은 다른 의사가 설명해 드립니다. 간호사, 다음 환자 들어오라고 해”라며 우리와의 대화를 원천 차단했다. 나는 환자 대기실에 앉아 있는 다른 환자 가족이 이 주치의에 대해 일종의 공포증을 안고 있음을 일찍부터 감지해 온 터였다.

그러나 이 병원에서 맘대로 주치의를 바꿀 자유가 없었다. 아내는 그날 그 병실에서 사실상 말기 선고를 받은 셈이다. 그때 그 의사는 오로지 “이제 오실 필요 없습니다”라는 가장 원시적이며 투박한 말로 임무를 끝냈다. 그처럼 비인간적인 어투가 환자를 마주하는 의사의 일상적 대화로 나올 수 있다는 현실이 무서웠다. 진찰실을 나서자마자 아내가 헛구역질을 시작하면서 나는 잠시 분노를 잊어버렸다.

무표정한 모습 보면 온몸이 굳어져

그때 다른 환자 가족의 동정 어린 시선이 아내에게 쏠렸다. 지금도 나는 세상을 떠난 아내가 꿈에서 나를 불러 왜 그런 의사를 찾아갔느냐고 물어보면 엎드려 사죄하고 또 사죄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내는 그것만은 묻는 일이 없었다. 한참 후 어느 날 그 병원의 고위 간부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의사들의 권위와 무표정한 얼굴을 화제에 올린 적이 있었다. 물어보나 마나 현재의 의료체계에서 오는 환자 피로증을 예로 들며 답변을 얼버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그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3분 진료’라는 현실을 피할 수 없다 하더라도 환자에게 따뜻한 한마디를 건넬 수 있는 마음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의과대에서부터 인문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세상에는 좋은 의사도 많지만 이상한 의사도 많다. 환자를 사람으로 대접하는 인간성 교육이 더 뿌리내릴 수는 없을까.

환자에게 권력이나 명예가 있으면 의사의 대접이 다를 것이라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그것 역시 오해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한 전직 장관에게서 말기 환자인 가족의 한 사람을 명의에게 데리고 가면서부터 수난이 시작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러 사람의 추천을 받아 주치의를 결정하고 난 뒤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경과에 대한 설명이 늘 모호해서 종잡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가족 면담도 한 차례뿐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또 수술해야 한다는 의사의 연락을 받았다.

환자가 단연코 수술을 거부하겠다고 버틸수록 아버지인 전직 장관은 가슴이 탔다. 거기에다 주치의의 무뚝뚝한 표정을 이겨 내느라 감정 억제가 힘들었다. 결국 그는 의사를 내치고 환자인 가족의 뜻을 존중했다.

나는 2008년 7월 국회의원 회관에서 열린 호스피스 관련 토론회에 잠시 참석했던 당시 국회의장의 축사도 잊지 못한다. 자신의 어머니에게 불필요한 수술을 몇 차례 했던 의사에 대한 불신을 털어놓았다. 결과적으로 아들인 자신이 어머니를 너무 괴롭혔다는 자책감을 감추지 않았다.

로봇같은 의사는 의료기술자일뿐

병원에서 어떤 의사의 진찰을 받는 게 좋은가를 묻는 독자들의 e메일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변했다. “결코 명의만을 찾지는 마세요. 기술만으로 명의가 된 사람이 많습니다. 잠시라도 마음을 열어 주는 의사를 찾아보세요. 제가 보호자라면 환자의 얼굴을 쳐다보며 환자의 고통을 이해해 주는 의사를 찾아가겠습니다. 그런 의사인지 아닌지는 진찰실을 드나드는 다른 환자들의 얼굴을 보고 곧장 판가름할 수 있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하는 데 2∼3초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 짧은 시간을 투자할 여유조차 없고 능력도 없는 의사는 명의가 아닙니다. 로봇처럼 시술하는 그냥 의료 기술자는 명의가 될 수 없지요.”

최철주 칼럼니스트 choicj114@yahoo.co.kr
#최철주#삶#죽음#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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