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연욱]문재인의 친노色 걷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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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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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욱 논설위원
정연욱 논설위원
2002년 노무현은 민주당 대선후보로 노풍(盧風)을 일으켰다가 불과 두 달도 안 돼 지지율이 급락하는 위기를 맞았다. 그해 8·8 재·보궐선거 패배로 “노무현 후보를 바꾸자”는 요구까지 터져 나왔다. 민주당 후보를 끝까지 지키자는 친노에 맞서 후보를 바꾸거나 신당을 만들자는 반노 진영의 목소리도 커졌다. 노무현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이었다.

노무현의 ‘오른팔’인 이광재는 청와대 요로에 호남 출신 동교동계 중진인 한광옥을 ‘해결사’로 요청했다. 한광옥은 1997년 대선 때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의 산파역이었다. 민주당 대표 시절 국민경선제를 처음 도입해 노풍의 견인차 역할도 했다. 한광옥은 2002년 9월 “노무현 후보 사퇴 서명운동은 부적절하다”며 당내 후보교체론을 비판했다. 이 발언은 친노, 반노로 갈라진 민주당의 전열을 재정비하는 디딤돌이 됐다. 2002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전병헌 민주통합당 의원은 한광옥을 노무현 정부 탄생의 숨은 ‘공신(功臣)’으로 평가한다.

그런 한광옥이 박근혜 캠프에 합류했다. 한광옥이 친노의 패권주의를 비판하자 문재인은 “그분들과 함께하는 것이 국민이 원하는 새로운 정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평가절하했다. 문재인의 발언은 집안을 단속하려는 계산에서 나왔겠지만 많은 민주당 인사는 “밑동이 빠져나간 느낌”이었다고 말한다.

친노의 좌장 이해찬은 노무현 정부 시절 ‘실세 국무총리’였다. 이해찬은 총리 시절 호남고속철도 사업에 대해 “투자효과가 미미하다”며 조기 착공에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가 거센 역풍을 맞았다. 오죽하면 노무현이 2006년 11월 목포에 내려와 “이해찬이 곧이곧대로인 사람이라 타당성이 없다고 말해 난리가 났다. 그래서 (내가) 정치적 관점에서 판단했다”며 이해찬의 발언을 뒤집었다. 호남고속철 발언은 호남인들에게 아직까지도 ‘친노의 낙인’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친노를 뛰어넘겠다”던 문재인은 아직도 친노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느낌이다. 호남에서 추석 연휴를 거치며 한때 지지율이 약진하는 듯했으나 호남 민심은 아직도 문재인을 ‘화끈하게’ 밀어주지 않는다. 야권 세력이 강한 호남 민심은 문재인 안철수의 단일화 승패를 가를 분수령이다. 문재인이 21일 호남 의원들을 만나 읍소한 것도 ‘빨간불’이 켜진 지지율 때문일 것이다.

박근혜는 민주당 양대 축인 DJ계와 친노계를 ‘갈라치기’하고 있다. 한광옥을 위시한 호남 인사들을 적극 영입하면서 문재인 주변의 친노색(色)을 더 짙게 만드는 전략이다. 안철수는 문재인이 확장성 없는 ‘친노 프레임’에 갇혀 있다고 본다. 그래서 안철수가 본선 경쟁력에서 문재인을 앞설 것이며 단일화도 결국 ‘안철수 대통령 후보’로 정리될 것이라는 분위기가 확산돼 가고 있다. 문재인이 박근혜와 안철수에게 협공당하는 형국이다.

친노는 민주당을 장악하고도 정치·정당 쇄신을 위해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이 없다. 야권연대로 압승을 장담했던 4·11 국회의원 총선에서 지고도 친노는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친노 좌장 이해찬을 내세워 당권 고수에만 몰두했다. 쇄신과 함께 가는 문재인 캠프의 통합 행보는 윤여준을 영입한 것만 기억날 정도다. 친노의 독선은 문재인의 발목을 잡고 있다.

문재인 선대위의 핵심인 ‘3철(이호철, 양정철, 전해철)’을 비롯한 친노 인사 9명이 2선 퇴진했다. ‘고뇌 어린 결단’이라는 자평이지만 짙은 친노색을 걷어내기엔 역부족이다. 친노 9인방의 선대위 퇴진에도 이해찬의 2선 후퇴론 불씨는 꺼지지 않는다. 문재인의 쇄신과 통합 행보는 겨우 첫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문재인#친노#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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