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하지현]‘묻지마 폭력’ 게임 탓만 아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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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현 건국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하지현 건국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게임에 빠져 학교에 안 가 유급을 하게 생겼다고, 어머니가 10대 아들을 입원시켰다. 컴퓨터를 못하게 하면 금단증상으로 괴로워하면서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웬걸, 그냥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며칠이 지나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게임이 얼마나 재미있기에 학교도 가기 싫었느냐 물었다. 재미있어서 한 것은 아니었단다. 할 게 없어서 했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수업시간이 재미없고, 학원에 가도 무슨 말을 하는지 쫓아가기 어려웠다. 공부를 해봤지만 성적이 생각만큼 오르지 않아 학원도 그만뒀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 오늘 학교 안 가”라고 큰 소리로 선언하고, 집에서 머물게 됐다.

자포자기 청소년들 게임에 몰두


게임의 중독성이 너무 강해 헤어나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니라, 현실이 재미없고 짜증나는 일만 있기에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게임을 선택한 것이다. 현상적으로는 게임중독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속내를 보면 ‘현실 도피’ ‘현실 탈락’이었다. 사실 성실한 생활을 하는 10대들은 게임을 하고 싶어도 할 시간이 많지 않다. 친구들과 어울려 한두 시간을 하면 고작이고, 어쩌다가 주말에 서너 시간을 할 뿐이다. 이에 반해 많은 시간 게임에 몰두하는 아이들은 여러 이유로 생활이 잘 관리되지 않는 상황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제인 맥고니걸은 ‘누구나 게임을 한다’라는 책에서 게임세계는 현실세계와 달리 노력한 만큼 보상이 있는 공평함이 특징이며, 실패를 하더라도 다음 기회를 주기 때문에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공정한 규칙 안에서 긍정적 피드백을 받고 적당히 어려운 수준의 과제를 수행하면서 결국 해결해내리라는 낙관적 기대를 갖고 몰입하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암울하다. 나름 꽤 오래 노력을 하지만 만족할 만한 성취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일등만 아는 더러운 세상이고, 나머지는 열등이다. 내신 관리가 안되면 아무리 수능을 잘 봐도 소용이 없고, 한 번만 시험을 잘못 봐도 상위권 대학은 포기해야 한다. 무언가에 몰입할 때 사람은 살아 있다는 것을 최고로 느끼고 삶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몰입할 기회를 얻기보다 열등감과 좌절감을 느낄 일이 더 많았다.

아이를 이해하게 되면서 정작 필요한 것은 게임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게 하고 끊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즐길 수 있는 것,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을 찾게 하고 현실세계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새 그동안 몰매를 맞아온 게임에 미안해졌다. 조금 세게 말하면 길거리를 배회하며 술과 담배를 하고, 몰려다니면서 거리의 어두운 세계를 너무 빨리 접하느니 집에서 조용히 게임을 하고 있는 게 낫지 않나, 생각도 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나온 청소년 셧다운 제도는 득보다 실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세계 복귀 위해 사회가 도와야


현실을 재미있게 느끼도록 만들고, 현실에서 튕겨나가게 만든 문제를 찾아내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다. 게임이란 부풀어 오른 풍선의 튀어나온 한 부분일 뿐이다. 무작정 게임을 못하게 위에서 누르면 풍선의 다른 곳이 튀어나올 뿐이다. 부푼 풍선의 바람을 빼는 일부터 해야 한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그렇게 10대를 보낸 이들이 20, 30대가 되었다. 청년실업과 사회적 좌절에 몰린 일부 청년에게는 현실과 게임 사이의 간극이 훨씬 커진 상태다. 그러니 작은 고시원과 PC방에서 현실과 담을 쌓은 채 게임 안에 머물러 있다. 조용히 침잠해 있는 이들이 언제 돌변해 ‘묻지마 폭력’으로 방향 전환을 할지 모른다. ‘잠시 정지’에 머물러 있는 삶이라는 게임을 현실세계에서 조속히 재개하도록 할 사회적 도움이 절실하다.

하지현 건국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시론#하지현#게임중독#묻지마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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