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기홍]송아지 요리에 대한 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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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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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국제부장
이기홍 국제부장
소값 파동 대책으로 정부가 송아지 요리 보급에 나섰다는 발표를 보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

국제뉴스를 다루는 필자의 직무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듣고 흘려버릴 사안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그림자 같은 게 남았다. 우리 사회가 지구촌이 지향하고 있는 거대한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답답함이었다.

송아지 요리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오른 것은 저물어가는 한 시대의 초상이었다.

소값 안정 위해 도살해 없앤다?

경쟁 효율성 적자생존 등으로 상징되는 서구 물질주의가 세상의 대세이고 선으로 여겨졌던 시대를 우리는 방금 거쳐 왔다. 특히 지난 십수 년간 세계를 지배해온 신자유주의 속에서 다들 정신없이 달렸고 그 대가로 물질적 풍요를 누렸다. 더 맛있는 것, 더 편한 것, 더 빠른 것… 더 많은 쾌감을 얻기 위해서는 그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욕망의 질주였다.

유럽의 한 이탈리아식당 메뉴판에서 처음 대면한 송아지 요리는 그런 시대의 속성을 보여주는 상징처럼 느껴졌다. 현지인이 설명해준 ‘빌(veal·송아지고기) 생산법’은 충격적이었다. 갓 태어난 송아지는 빌 크레이트라는 상자에 갇힌다. 쇠사슬에 묶여 발도 제대로 못 편다. 근육 없는 연하고 핏빛이 적은 고기를 만들기 위해 움직이지 못하게 한 채 철분을 뺀 고단백 유동식을 먹인다. 태어나서 4, 5개월을 그렇게 살다가 도축장으로 끌려간다.

2009년 미국에서는 송아지 도축장 폭로 영상이 나왔다. 파이프로 때리고, 의식이 깨어 있는 송아지의 목을 따고, 시간당 작업량을 늘리기 위해 숨이 채 끊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가죽을 벗기고….

더 연한 고기를 위해서라면 어린 생명이라도 개의치 않고 입맛을 다시는 소비자,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선 그 무구한 눈망울을 꼬챙이로 찔러 컨베이어로 내모는 업자들의 합작품인 송아지 요리가 칭송받을 만큼 서구 물질문명은 끝을 모르는 욕망 충족을 향해 내달려 왔다.

그러나 차면 기우는 법. 지금 세계는 경쟁과 효율에 대한 숭배를 멈추고 방향을 대전환하고 있다. 글로벌 경제위기와 월가 점령 시위, 갈수록 커지는 빈부 격차가 울린 경종에 정반합(正反合)의 자기수술에 들어간 것이다.

경쟁 공격 포식(捕食) 대신 공존 형평 공유 생명 따스함이 강조되고 있다. 상대를 제압해 독식하는 대신 마음의 문을 열고, 상대의 처지에 서 보는 공감(sympathy)과 감정이입(empathy)이 중시되고 있다. 경쟁과 효율성의 왕국인 미국의 대통령마저도 신년 국정운영의 화두로 공평을 제시했다.

이런 흐름에서 ‘넘치니 도살해 없앤다’는 접근법은 낡은 시대의 냄새가 난다. 효율성과 경제성만을 따지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백신 접종을 거부한 채 330만 마리의 소 돼지를 매장한 것과도 맥이 통한다.

근래 유럽과 미국 각 주에선 비인도적인 송아지 사육에 대한 규제 강화가 잇따르고 있고, 송아지 요리 반대 움직임도 커지고 있다.

서양의 왜곡된 식습관 따라해서야

송아지 요리가 소값 파동을 안정시켜 준다면 그나마 위안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일단 농민단체들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선진국에서 즐겨먹는 부드러운 고기”라며 출입기자들을 상대로 송아지 요리 시식회까지 열었다. 하지만 다수 참석자의 반응은 “질기고 맛없다”는 것이었다. 우유로 키운 서양의 송아지 고기와 달리 우리 송아지는 그냥 사료로 키워 연함이 덜한 데다 마블링이 생기기 전에 도살됐기 때문이다.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전통적으로 우리는 송아지를 먹지 않았다. 어린 생명의 눈망울을 보며 ‘연한 스테이크’를 떠올릴 만큼 한국인의 상상력은 강퍅하지 않았던 것이다. 서구 물질문명이 공존 동감 생명이라는 동양적 가치를 향해 선회하고 있는 지금, 서양인들이 버리고 있는 왜곡된 식습관을 뒤늦게 따라가는 게 타당한 일일까.

이기홍 국제부장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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