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보훈처에 서훈 취소 권한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27일 03시 00분


서울행정법원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으나 올해 4월 서훈을 취소당한 독립유공자 강영석 김우현 씨의 후손이 제기한 소송에서 “헌법과 상훈법에 훈장은 대통령이 수여하는 것으로 명시돼 있으므로 서훈 취소도 대통령만이 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국가보훈처가 지난해 12월 이들을 포함한 독립유공자 19명에 대해 서훈 취소를 결정하고 올해 4월 국무회의가 확정한 조치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는 판결이다.

당시 서훈 취소는 내용 면에서도 공정성과 역사적 형평성을 상실했다. 서훈 취소를 결정한 심사위원들은 해당 인사들의 친일행위가 밝혀졌다는 것을 취소 이유로 내세웠다. 그러나 취소 대상에 포함된 장지연 황성신문 주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아 원통한지고. 이천만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라며 민족의 항거를 촉구한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쓴 대표적인 항일 언론인이다. 노무현 정권 때 ‘과거사 청산’을 목적으로 조직된 대통령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도 ‘친일 혐의를 엄격히 적용하기에는 다소 미흡하다’며 대상에서 제외했다.

보훈처는 심사위원들의 명단을 공개하라는 요구를 ‘사생활 보호’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독립유공자를 하루아침에 ‘친일 인사’로 격하시킨 이들의 결정은 분명히 공적(公的) 활동인데도 왜 명단을 못 밝히는 것인지 납득할 수 없다. 심사위원 가운데 ‘친일인명사전’ 편찬 등에 참여한 좌(左)편향 인사가 여럿 포함돼 공개를 꺼리는 것은 아닌가.

이들의 잣대는 이중적이다. 좌파 진영에서 떠받드는 인물 중 하나인 여운형은 태평양전쟁 때인 1943년 11월 ‘청년은 세계를 향해 총을 들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라며 일본군 입대를 미화하고 권유하는 글을 썼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2005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한 뒤 좌파 진영에서 미흡하다는 불만의 소리가 나오자 2008년 2월 노 대통령의 퇴임 직전에 최고 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다시 추서했다. 자신들과 노선이 다른 인물에 대해서는 ‘흠집 내기’에 열을 올리는 일부 민간단체의 정치적 의도에 보훈처가 놀아났다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정부는 억울하게 서훈을 취소당한 인사들의 명예를 원상회복해야 한다. 광복 이후 오랜 기간에 걸쳐 역사가 축적된 서훈을 일개 정권이나 각료가 멋대로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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