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을 들며/이민아]기억의 아카이브, 우체통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15일 03시 00분


코멘트
이민아 시조시인·200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이민아 시조시인·200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퇴근길엔 가끔 부산 중앙동 부산우체국 40계단 앞 ‘하늘로 보내는 편지’ 우체통 앞으로 지나간다. 이승의 숨을 거두고 바람으로 찾아오는 그리운 사람들이 우표 대신 보낸 낙엽이 한창이다. 기억의 아카이브 같은 우체통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우리 동네뿐 아니라 제주 두모악 김영갑갤러리, 통영 동피랑, 선암사 해우소, 간절곶 등대 앞에서, 순천 정채봉문학관의 하늘나라 우체통 앞에서,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채워주지 못하는 속도의 틈, 감정의 구멍을 우표로 메울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다.

가을 낙엽처럼 주체할 수 없는 우편물의 홍수 속에서 몇 통의 편지를 받았다. 이게 얼마 만인지. 우표가 붙어 있고, 소인이 찍힌 편지라니! 그들은 이 편지를 어떻게 내게 보내왔을까. 요즘 우체통도 별로 없는데…. 지난여름 강원 원주 토지문화관을 다녀오며 쓴 편지를 보낼 우체통을 찾아 한 시간 동안 원주시내를 걸었던 기억이 있다.

편지를 펼치자 희미한 감동의 기억들이 왈칵 쏟아졌다. 일터인 부경대 학생들과 ‘독서토론클럽 블루머그’를 만들어 ‘책편지 쓰기’ 운동을 하는 내 소소한 일상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출소하면 시 읽고 봉사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수인, 아동보호시설 ‘원장 엄마’의 애정 어린 편지까지…. 힘겨운 시간을 견디고 행복한 순간을 나누는 이들의 사연을 내게 선물해준 우체통의 존재는 여전히 유효하다.

받은 편지들을 정리하려고 사진첩을 펼쳤다. 알프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우체통에서 보내온 벗의 엽서에는 청춘의 안부를 묻는 싱싱한 우정이 담겨 있고, 여고 시절 시인이 꿈이던 내게 꿈을 키우라며 답장을 보내준 정호승 시인의 엽서가 스크랩되어 있다. 중학생 때 처음 만나 가슴으로 키운 딸이 자라 서른이 됐을 때, 시인이 된 딸의 엄마로 살게 해 주어 행복하다는 절절한 마음을 담은 새어머니의 긴 편지가 그 뒤를 장식했다. 그때 어머니는 우체통을 우체부도 찾지 않아 편지가 가지 않은 건지 걱정하며 골목 우체통 앞에서 며칠을 기다렸다고 했다. 다시 생각해도 그 기다림, 고맙고 애틋하다.

그러고 보니 부산에서는 지난봄, 편지콘서트가 열렸다. 우리 모두가 깃들고 싶은 공감과 배려, 격려를 한껏 담을 수 있는, 기억의 리허설을 펼칠 수 있는 무한한 무대가 바로 ‘편지’라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주변의 우체통들이 무수한 지나침 속에서 지갑이나 전화기 등 분실물 습득창구로 쓰이는 일이 더 많다지만, 내게는 여전히 청춘의 애잔한 기억을 간직하고 나를 응시해주는, 오랜 친구의 눈동자 같다. 심장 언저리를 따뜻하게 하는 공간의 기억을 간직한 우체통들을 만나 아름다운 바라봄을 나눌 수 있는 삶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삶은 우체통을 만나는 여행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붉게 충혈된 그 사람의 망설이는 눈동자, 함께 청춘을 견디는 학생들의 착한 눈매처럼…. 기약 없는 미래의 자신을 긍정으로 예언하며 꿈을 키우는 수많은 ‘우리들’ 곁에서 한시도 한눈팔지 않고 생의 길목을 지켜 선 우체통. 이 삶의 부표 덕분에 오늘도 내가 가야 할 길을 놓치지 않는다.

이민아 시조시인·200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