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영]침묵이 부른 역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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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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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영 사회부 차장
이동영 사회부 차장
꿈에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앞으로 가야 할 지하철이 뒤로 가리라고는.

서울시 지하철 열차의 첨단 컴퓨터는 중앙관제실과 연결돼 기관사가 자동 모드로 맞춰 운전해도 아무 탈이 없을 정도로 관제시스템이 뛰어나다. 객차 내에는 위급상황에 대비한 방화 시설과 비상통화 장치까지 설치돼 있다.

역주행이 발생한 11일 오후 3시 45분. 하계역을 출발한 7호선 7186호 열차 기관사는 시민 안전을 위해 설치한 비상통화 장치로 들려온 다급한 목소리에 열차를 세웠다. 50대로 추정되는 남성은 “하계역에서 문이 안 열렸다. 왜 문을 안 열고 가느냐.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이 ‘지하철 억지남’은 “하계역에서 못 내린 거 손해배상 청구하겠다”고 기관사를 다그쳤다. 당황한 기관사는 통제실 관제사에게 연락해 이런 사정을 설명했다. 즉각 응답을 듣지 못한 ‘억지남’은 기관사를 향해 “야! ××× ××야 빨리 문 열어. 옆 사람도 못 내렸어. 여기 사람들 다 못 내렸어!”라며 욕설과 함께 거짓을 외쳤다. 이 내용은 하도 크게 울려 기관사와 관제사의 통화가 녹음되는 중에 고스란히 함께 녹음됐다.

짧은 시간에 욕설과 함께 ‘손해배상’ ‘미정차’ ‘승객’ 이런 단어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자 기관사는 자신이 열차 문을 열었으면서도 순간 착각에 빠졌다. 1분도 지나지 않은 일에 확신이 서지 않은 기관사와 통제실은 결국 170m를 역주행하자는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열차는 다른 승객 수백 명의 피해를 외면한 채 폭언을 퍼붓던 ‘억지남’을 하계역에서 내려준 뒤에야 다시 앞으로 달릴 수 있었다.

이 사건은 해프닝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막장으로 치닫는 우리 사회의 단면이기도 하다. 그래서 꼼꼼히 해부해 보면 이 사건의 발생 원인으로 3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다중을 위한 제도의 악용’이다. 비상통화 장치는 객차 내에 응급환자, 범죄 또는 화재 발생 시 이를 기관사에게 알리는 중요 수단이다. 다중의 안전을 위해 마련된 장치인데 이번 역주행에서는 ‘억지남’이 악용했다. 서울도시철도공사에 따르면 이전에도 이 장치는 승객들이 ‘덥다, 춥다’고 불평할 때 가장 많이 쓰였다. 1월부터 11월까지 119건이 이용됐는데 거의 대부분 이런 내용이었고 위급 상황은 없었다고 한다.

두 번째 원인은 ‘원칙 없는 리더’다. 승객 수백 명의 안전을 책임진 기관사는 리더로서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다수의 이익과 안전에 맞는 판단을 내렸어야 한다. 하지만 목소리 큰 ‘억지남’의 몇 마디 폭언에 자신의 역할을 까맣게 잊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다수의 인명 피해를 낼 수도 있는 역주행이었다. 원칙 준수라는 책임감보다 목소리 큰 승객의 드잡이가 무서워 그만 굴복해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세 번째 원인은 ‘침묵하는 다수’다. ‘억지남’이 다중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비상 전화로 엉터리 주장을 마구 펼칠 때 다수의 승객은 말리지 않고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위압적인 억지 주장에 휘둘린 리더가 역주행을 시도한다고 했을 때도 누구 하나 일어나 잘못된 주장이며 위험한 선택이라고 지적하지 않았다.

3가지 원인을 쓰고 보니 지하철뿐 아니라 땅 위 세상의 걱정거리로 머리가 지끈거린다. 표현의 자유가 악용돼 사실이 아닌 엉터리 여론이 나라를 뒤흔들지 않는지, 이런 여론에 휘둘려 국가 주요정책을 역주행시킨 지도자는 없는지, 그 모든 일이 반복돼도 다수의 선량한 국민은 그저 눈감고 침묵하지 않는지 말이다.

이동영 사회부 차장 arg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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