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아내에게 수시로 메모와 휴대전화 메시지를 남겨 살림에 관한 잔소리를 하면 이혼 사유에 해당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김치 쉬겠다. 오전에 뭐한 건가’ ‘주름 한 줄로 다려줄 것’ ‘음식 빨갛게 하지 말고 하얗게 할 것’ ‘나물·버섯은 시들기 전에 요리할 것’…. 전후 맥락을 모르면 안주인이 가사도우미에게 지시한 말 같다. 서울가정법원은 최근 쉴 새 없는 잔소리로 아내(37)를 지치게 만든 학원 강사 남편(46)에게 결혼 파탄의 책임을 물었다.
▷지난해 11월 법원은 남편으로부터 6년 동안 메모지를 통해 살림 지시를 받은 아내(76)의 이혼 청구를 받아들였다. 경찰 출신의 권위적인 남편(80)은 ‘앞으로 생태는 동태로 하고 삼치는 꽁치로 바꿀 것’ ‘두부는 비싸니 많이 넣어서 두부찌개 식으로 하지 말고 각종 찌개에는 3, 4점씩만 양념으로 사용할 것’ 같은 메모를 남겨 아내를 옴짝달싹 못하게 통제했다. 순종과 인내를 미덕으로 알고 살던 아내는 깻잎 반찬을 상에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멱살을 잡히자 마침내 이혼을 청구했다.
▷‘남자가 부뚜막 살림을 간섭하면 계집을 못 거느린다’는 옛말이 있다. 남존여비(男尊女卑)의 냄새가 나긴 하지만 부부지간에도 각자 영역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전업 주부는 물론이고 가사를 분담해야 하는 맞벌이 부부의 경우에도 남편은 아내의 영역을 존중해 줘야 한다. 남편이 수시로 냉장고 문을 열어 이것저것 따지고 타박하는 것은 아내가 남편 직장에 들이닥쳐 책상 서랍을 뒤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마찬가지로 아내가 남편의 통화 내용을 엿듣고 e메일, 문자메시지를 훔쳐보는 것도 잘못이다.
▷남편이 은퇴해 부부가 함께 지내게 되거나 가족이 해외로 나가 살게 되면 부부싸움이 잦아진다. 부부가 하루 종일 집 안에 같이 있다 보니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일로 부딪칠 일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부부 일심동체(一心同體)’라는 말은 서로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 것이지, 상대 영역에 대해 무불간섭하라는 뜻은 아니다. 부부는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존재라고 한다. 화초도 물을 너무 많이 주면 죽어버린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안전거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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