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프리즘/허승호]칠레 와인의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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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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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칠레에 다녀왔다. ‘칠레의 와인(Wines of Chile)’ 초청이었다. ‘칠레의 와인’은 칠레 정부와 와인생산업자들이 공동출자해 만든, 우리로 치면 농협 같은 단체다. 이 조합이 기자를 초청한 것은 한국이 칠레산 와인을 세 번째로 많이 사주는 나라이기 때문이다(1위 미국, 2위 캐나다). 한때 미 캘리포니아 와인이 프랑스 와인을 잠식한 것과 똑같은 이유로 싸지만 질 좋은 칠레산이 미국산을 대체한 것이다.

두 번째 변신 모색하는 와이너리들

한국에서 온 기자는 칠레에서 인기 최고였다. 와이너리들이 앞 다퉈 “우리 농장을 방문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덕분에 매일 3개씩 와이너리를 돌아보면서 40∼50종의 와인을 시음해야 했다. 고달픈 일정이었지만 대단한 호사이기도 했다.

칠레 와인이 수출경쟁력을 갖춘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칠레는 전통적인 와인생산국이었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대충 만든 염가제품’이었다. 농장주는 카베르네쇼비뇽과 피노누아 등 자기 밭에서 수확한 여러 품종의 포도를 적당히 혼합했고, 포도잎이나 가지도 제대로 골라내지 않았다. 대부분 국내에서 소비됐다.

그러나 1980, 90년대 들어 대변혁을 겪는다. 스페인의 모란데 같은 유럽의 와이너리들이 칠레의 기후와 토질, 가능성에 주목해 대서양을 건너온 것. 이들의 투자로 와인 품질과 평판은 극적으로 향상됐다. 싸지만 ‘싸구려 와인’이 아니라는 이미지를 확보한 것. 1985년 1000만 달러였던 와인수출액은 1998년 5억5000만 달러, 55배로 성장했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된 2004년 ‘칠레의 와인’도 출범했다.

요즘 칠레 와인은 또 한 번의 변신을 모색 중이다. 몬테스의 경우 콘서트홀 모양으로 지은 저장고에서 그레고리안 성가를 들려주며 고급와인을 숙성시킨다. 코노 수르는 곰팡이와 익충을 이용한 방제, 비료 대신 밭고랑에 콩과 식물 키우기 등의 방식으로 유기농 포도를 키우고 있다. 가르세스 실바는 고급 이미지를 위해 4종의 특급 와인에 주력한다. ‘1865’를 만드는 산페드로는 전품목 병입 숙성을 본격화했다. 칠레 정부도 유전공학을 와인산업에 접목하고 있다. 현대차가 주력 수출품목을 소형차에서 중형차로 옮기는 데 성공했고 이제 고급차 시장을 겨냥하고 있듯이 이들도 고가 시장을 두드리는 것. 프랑스 와인에 끼어 있는 가격거품을 정조준하고 있다.

이들은 기자에게 “7월 한-유럽연합(EU) FTA가 발효된 후 한국 시장에서 값싼 스페인산 와인에 대한 평가가 어떠냐”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시장에서 어떤 차별화 전략이 유효할지, 그리고 한국에서 세계 경제위기의 여파가 얼마나 클지 몹시 궁금해했다.

네루다의 나라가 혁신의 나라로

사실 청년시절의 필자에게 칠레는 ‘와인의 나라’가 아니었다. 민중의 벗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미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아옌데를 살해하고 17년간 군사독재를 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그리고 절규하던 저항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나라였다. ‘산티아고에 내리는 비’ ‘미싱(실종)’ 등이 당시 나온 영화들. 칠레의 우울한 현대사가 우리의 4·19, 5·16, 10·26, 5·17과 오버랩되면서 청년은 깊은 연민과 연대감을 느꼈었다.

하지만 이번 취재를 통해 민주화 이후 칠레가 와인의 나라로 탈바꿈했음을 확인했다. 그것이 그곳 와이너리들의 과감한 혁신의 결과였음도 알게 됐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변화를 감지하고 또 한번의 도전을 시도하고 있었다. 문득 한국의 사정이 머리에 떠올랐다. 유럽발 재정위기와 미국의 더블딥 우려 등 글로벌 거시경제 여건이 심상찮은 상황, 힘든 시기를 단단히 대비해야 할 때다. 하지만 한미 FTA 비준은 여전히 정쟁(政爭)거리다. 동반성장 방식을 둘러싼 입씨름으로 날을 지새우고 있고 선거는 아직도 네거티브 일색이다. 우리는 얼마나 내일을 준비하고 있는가.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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