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있게한 그 사람]박효남 밀레니엄 서울힐튼 총주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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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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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는 재료 맛이야!”… 한밤 불호령에 ‘성게알 찾아 삼만리’

일러스트레이션 최남진 nam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최남진 namjin@donga.com
박효남 밀레니엄 서울힐튼 총주방장
박효남 밀레니엄 서울힐튼 총주방장
숨이 턱턱 막혔다. 어깨에 연탄을 짊어지고 달동네 좁은 골목을 힘겹게 오를 때면 배고픔은 차라리 사치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 나의 중학교 시절은 새까만 연탄 자국과 땀 냄새가 뒤섞인 암울한 회색빛이었다. 동생들을 위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천신만고 끝에 열아홉에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이어 현재의 직장인 밀레니엄 서울힐튼(입사 당시 ‘서울힐튼’)에 입사했다. 작은 체구에다 남들만큼 배우지 못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새벽에 출근해서 늦은 밤에 퇴근하는 그 흔하디흔한 ‘성실함’뿐이었다.

나를 그저 그런 요리사에서 요리에 인생을 걸게 만든 사람으로 바꾼 인물은 다름 아닌 벽안의 오스트리아인 서울힐튼 총주방장 하우스버거 씨였다. 호텔 총주방장이 어떤 인물일까? 치열한 호텔 주방세계에서 산전수전 겪으며 익힌 실무 경험에다 이론까지 겸비한 인물이 바로 글로벌 체인호텔의 총주방장 자리다.

처음에는 총주방장 하우스버거 씨가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 절대 웃는 법이 없었고 말투는 퉁명스러웠다. 또 유독 나에게 왜 그렇게 일감을 많이 주는지…. 동료 요리사들에게 시켜도 될 것 같은 소소한 일감까지 하우스버거 씨는 내게 지시했다. 약속된 시간에 음식이 제공돼야 하는 게 생명인 VIP 연회행사에서 조리과정이 아주 조금, 기억하건대 3∼5분 늦어졌을 뿐인데 연회주방에서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물이 나도록 호통을 치신 일이 생각난다.

1990년 처음으로 출전한 싱가포르 세계요리대회에서의 일이다. 준비된 성게알을 보자마자 “이런 시들시들한 성게알로 어떻게 작품을 내놓을 수 있느냐. 당장 나가서 다른 성게알을 구해와라”고 호통을 치셨다. 싱가포르엔 한국처럼 싱싱한 성게가 드물었다. 오후 9시쯤 길도 잘 모르는 싱가포르 시내에 내동댕이쳐진 나는, 눈에 보이는 큰 호텔들을 일일이 돌아다녀야 했다. 손짓 발짓으로 성게알을 구해봤지만 허사구나 하던 차에, 큰 기대를 갖지 않고 들어갔던 작은 호텔에서 기적적으로 성게알을 구할 수 있었다. 그 성게알로 밤새워 요리를 만들어 국제대회에서 첫 메달을 수상했던 일도 생각난다. 총주방장이 된 이제야 나는 느낄 수 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던 그 외국인 총주방장이 조리사로서 나를 정말 깊이 아끼고 사랑했다는 것을. 내게만 유독 집중됐던 일감과 꾸지람은 나에 대한 강한 애정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요리뿐이었다. 그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재료에 집착했다. 요리에 제대로 미친 사람이었다. 나와 얼마간의 친분이 쌓인 뒤에 그는 내게 퇴임 후의 계획에 대해 고백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고향 오스트리아 빈에 가서 테이블 4, 5개 정도의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는 은퇴한 뒤 계획을 실현했다. 몇 해 전 나는 빈에 있는 그의 식당을 방문했다. 식당이 자리를 잡아서인지 손님들이 꽤 북적였다. 그는 “지금이 내 인생의 전성기”라고 말문을 열었다. 식당 문을 연 초기에는 손님 구경하는 일 없이 영업을 마치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어느 날 30대 후반의 젊은 부부가 저녁 나절 예약 없이 식당 문을 열더니 자리에 앉더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여자가 장님이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 메뉴판에 있는 음식 하나하나를 정성껏 설명해 주었고 아내는 귀를 쫑긋 세우며 남편의 설명을 들었다. 하우스버거 씨는 그들이 주문한 음식을 정성껏 만들어 내어주었고, 부부는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남김없이 음식을 먹었다. 식당 문을 나서기 전 부부는 “참 맛있는 음식이었습니다”라고 짧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고 한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하우스버거 씨는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고 했다. “그래, 내 직업은 정말로 위대한 거야!”라면서.

그런 그가 재작년 심장마비로 생을 달리했다. 스승을 잃은 제자의 심정을 어찌 내 짧은 글재주로 표현할 수 있으랴! 스승이 남긴 위대한 가르침을 가슴속에 새기며 오늘도 난 호텔을 찾는 고객을 위해 묵묵히 음식을 만들고 있다.

박효남 밀레니엄 서울힐튼 총주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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