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윤종구]반복되는 日 도발… 정부대응도 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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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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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구 도쿄 특파원
윤종구 도쿄 특파원
지난해 10월 말 일본 교토(京都)로의 가족여행. 교토국립박물관 바로 옆 자그마한 ‘유적지’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귀 무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전리품으로 베어간 조선인의 코와 귀를 묻은 곳이다. 그래서 ‘코 무덤’이라고도 한다. 조선인 12만6000명의 억울한 영혼이 잠들어 있다. 비문을 읽고 머리를 숙이던 중학생 아들이 끝내 못 참고 펑펑 눈물을 쏟아내자 수학여행 와서 수다를 떨며 사진을 찍던 일본 여고생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우리 가족과 귀 무덤을 번갈아 봤다.

돌아오는 길. 불과 100m 떨어진 곳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기리는 도요쿠니(豊國)신사가 웅장하게 서 있었다. 무겁고 부피가 큰 머리 대신 코와 귀를 베어 오라고 지시한 장본인이다. 초라한 귀 무덤을 돌아보며 다시 한 번 가슴을 쳤다.

사람 간에도 그렇지만 국가 간에도 이웃끼리는 항상 애증이 교차하는 법이다. 바로 옆에서 오랫동안 부대끼다 보면 서로 웃음과 이익을 나누기도 하지만 상처를 주고받는 일도 많다. 하지만 ‘상처’에 관한 한 한국과 일본만큼 지속적이고 일방적인 관계가 또 있을까 싶다.

133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내가 죽으면 화장해 유해를 바다에 뿌려 달라. 용이 돼 나라를 지키겠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의 유언(681년)이다.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 때문이었다. 대왕은 삼국통일 후 국내 영토를 탐내던 당나라군까지 내쫓았으나 눈을 감는 순간까지 수시로 백성을 약탈하는 왜구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불교의 힘으로 왜구를 막고자 감은사까지 지은 그였다.

왜구는 고려 말기인 1300년대에는 100∼500척의 선단을 이끌고 쳐들어와 수도 개경까지 위협했다. 재물과 문화재는 물론이고 사람까지 납치해 노예로 팔아넘겼고, 전국의 조세를 개경으로 운반하던 곡물운반선까지 자주 가로챘다. 왜구는 사회불안과 국가재정 궁핍을 야기해 고려 멸망의 한 원인을 제공했을 정도다.

조선시대에도 왜구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다. 골머리를 앓던 조정은 세종 원년(1419년)엔 쓰시마(對馬) 섬 정벌까지 단행했으나 폐해는 그치지 않았다. 1500년대 초중반의 삼포왜란, 사량진왜변, 을묘왜변은 조선 사회를 크게 위협했다. 왜구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수백 건이나 등장한다.

1592년의 임진왜란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조선을 궤멸시켰다. 한양이 무너졌고 수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군은 학자와 도공 등 ‘전문가’를 닥치는 대로 끌고 갔다. 1910년 일본은 결국 조선을 강제 병합했고 식민지는 35년간 이어졌다.

강제병합 100년을 맞은 지난해 한일관계는 역대 최고라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여전히 한일관계는 ‘롤러코스트’를 타고 있다. 올해만 하더라도 3·11 동일본 대지진 때 한국이 범국민 차원에서 도움을 주자 일본은 감사에 겨워했다. 하지만 3월 말 일본이 중학교과서에 독도 영유권 표현을 강화하자 한일관계는 급랭했다. 5월 이명박 대통령이 대지진과 원전사고 피해지역을 방문하고 농산물을 입에 넣자 일본은 다시 반색했다. 지난달과 1일엔 일본 자민당 의원 3명의 울릉도 방문 소동으로 다시 관계가 곤두박질쳤다. 곧바로 일본은 ‘독도는 일본 땅’이란 내용의 방위백서를 내놨다. 최근 한일관계가 나빠지는 원인은 거의 일본의 독도 도발 때문이다. 수백 년 이상 지속된 도발의 현재진행형이다.

한일관계 개선의 해답은 간단하다. 일본이 잘못된 역사를 끊으면 된다. 이런 역사를 뻔히 알면서도 그때마다 미숙한 대응으로 손해를 자초하는 우리 또한 반성해야 한다.

윤종구 도쿄 특파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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