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철희]정전체제 60년의 피로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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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7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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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정치부 차장
이철희 정치부 차장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조선)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은 6·25전쟁 발발 3년 1개월 만인 1953년 7월 27일 체결됐다. 협상은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시작됐다.

미군 극동해군사령관 터너 조이 중장을 수석대표로 한 유엔군 측 대표단 5명 가운데 유일한 한국군 대표는 백선엽 장군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절대 반대’를 외친 회담에 유엔군 측의 지명을 받아 협상장에 들어간 그의 심정은 복잡했을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라곤 마주앉은 상대를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어느 날 북한 대표는 백지에 빨간 색연필로 낙서를 하더니 슬며시 나에게 보였다. ‘제국주의자의 주구는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 주먹으로 갈겨주고도 싶었지만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다. 우리가 힘을 기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다는 생각뿐이었다.”(회고록 ‘군과 나’에서)

이렇게 시작된 협상은 2년이나 계속됐다. 38선 전역에 걸쳐 참혹한 진지 쟁탈전이 벌어졌고 미군의 북폭도 이어졌다. 정전협상 시작 이전보다 이후의 희생자가 더 많았다. 그 사이 한국군 대표는 네 차례나 바뀌었지만 모두 유엔군사령관이 일방적으로 선정한 이들이었다. 이승만은 이들을 만나면 언제나 “자네가 무슨 대표라지?”라고 물으며 못마땅해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처음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각료들에게도 침묵을 지키라고 지시했다. 김일성의 도발로 시작된 전쟁이지만 어느덧 미-중 전쟁이 된 상황에서 정전회담도 워싱턴과 베이징에서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협상이 막바지에 이르자 이승만은 저항하기 시작했다. 반공포로 2만7000명을 석방하는 실력행사까지 했다. 미국은 한때 쿠데타로 이승만을 축출할 생각까지 했지만 이승만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벼랑 끝 전술로 이승만은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이승만은 끝내 정전협정 조인식에 한국군 대표를 참석시키지 않았다. 이는 지금까지도 한국의 당사자 자격을 인정하지 않으며 미국을 향해 평화체제 전환을 운운하는 북한 측 주장의 빌미가 됐다.

정전협정 이후 남북 간에는 군사적 도발과 충돌이 끊이지 않았지만 제2의 6·25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수많은 정전협정이 체결됐지만 이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가장 잘 유지되고 있는 협정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정전협정은 전쟁의 종식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현상유지를 바라는 강대국들의 의사에 따른 전쟁 이전 상태로의 원상회복에 불과했고 이는 곧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를 의미했다.

정전체제 60년이 됐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기본적인 대결구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해 천안함 폭침 이후 형성된 동북아의 신냉전 기류는 정전협정 당시의 ‘한미 대 북중’ 구도를 재현하고 있다. 당장 무력도발에 직면한 우리에겐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꿔야 한다는 논의는 먼 이야기처럼 보인다.

다만 이미 1년이 훨씬 지난 천안함 대결구도가 마냥 계속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현상유지를 원하는 주요2개국(G2) 시대의 미국과 중국도 한반도 긴장 지속에 피로감을 느끼며 남북 당사자의 뜻과 관계없이 ‘천안함 정전체제’를 모색할 수도 있다. 정전협정이 우리의 선택이 아니었듯 60년이 지난 지금도 선택의 폭은 제한돼 있다. 현실을 냉철히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철희 정치부 차장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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