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정용석]‘6·25전쟁’ 아닌 ‘6·25남침’으로 불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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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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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석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정용석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요즘 대부분의 학자는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에 이뤄진 북한의 기습남침을 ‘6·25전쟁’으로 불러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6·25전쟁은 역사적 교훈을 살리고 후세에 더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6·25남침’이라고 해야 한다.

그동안 6·25남침에 대한 호칭은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다. 6·25 직후엔 ‘6·25사변’ ‘6·25동란’으로 표현됐다. 사변은 큰 변고를 뜻하고, 동란은 난리가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6·25사변과 6·25동란은 우리 국민이 역사 속에서 늘 접했던 ‘이자겸의 난’ 등 나라의 큰 변고와 난리를 연상한 말이다.

1970년대 들어 한국 사회가 점차 국제화되면서 6·25남침이라는 명칭도 국제화되었다. 외국인들이 ‘한국전쟁’이라고 통칭하자 우리도 덩달아 그렇게 불렀다. 제3국인들이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제3자의 시각에서 보면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평화롭게 새벽잠을 자다가 기습당한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전쟁이란 명칭은 역사적 교훈을 없애버렸고 국적 없는 제3자의 서술에 지나지 않는다. 북한이 도발한 침략이었음을 표출하는 의미가 통째로 빠져 있다. 북한의 억지대로 ‘북침전쟁’이나 ‘민족해방전쟁’으로 간주하게 할 수 있다. 중국의 주장대로 ‘항미(抗美)원조전쟁’으로 해석하게도 한다.

그런 모호성을 없애기 위해 새로 등장한 대안이 6·25전쟁이다. 6·25전쟁은 1950년 북한의 남침 일자를 박은 단어라는 데서 북한의 남침을 연상시킬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6·25전쟁도 북한의 남침을 함축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6·25전쟁에는 ‘한국전쟁’처럼 도발자가 명시돼 있지 않다. 그저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을 떠올리기 위해 6·25라는 숫자를 끼워넣었을 뿐이다. 요즘 어린 세대는 6·25전쟁 하면 인기 있는 컴퓨터게임 정도로 인식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6·25남침을 당한 1세대가 세상을 떠나고 2, 3세대 이후로 넘어가면 6·25전쟁도 남침이란 단어가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6·25가 남침이었는지 북침이었는지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남침이라고 똑떨어지게 호칭을 못하는 데는 그럴 만한 연유가 있는 것 같다. 종북 좌익세력의 거센 반발에 부닥치거나 보수 꼴통으로 몰리는 것을 의식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6·25전쟁에는 남침이라는 확실한 뜻이 포함되어야 한다. 즉, 6·25남침이어야 한다. 처음부터 우리나라는 6·25동란이나 6·25사변이라 부르지 말고 6·25남침으로 통칭했어야 했다. 사변과 동란에도 도발자를 명시하는 의미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좌익세력의 북침 주장이 비집고 들어올 수 있는 빈틈을 제공한 셈이다.

역사적으로도 조선조 임진년 일본의 침입을 ‘임진전쟁’이라고 하지 않는다. 침략자를 명백히 하기 위해 임진년에 왜(倭)국이 도발한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병자년에 자행한 청나라의 내침도 병자년에 호(胡)국인 청국에 의한 침략이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병자호란’이라고 한다. 절대로 ‘병자전쟁’이라고 하지 않는다.

똑같은 맥락에서 6·25남침을 6·25전쟁으로 부르는 것은 임진왜란을 임진전쟁으로, 병자호란을 병자전쟁으로 흐려놓는 것과 다르지 않다. 미국도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을 ‘12·7전쟁’이라고 하지 않는다. 반드시 ‘진주만 공격(Pearl Harbor Attack)’으로 호칭한다. 6·25전쟁도 한국 국적이 박혀 있고 교훈이 살아있는 6·25남침으로 고쳐 써야 한다. 수백 년 후를 내다보면 더욱 그렇다.

정용석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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