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재승]융합연구를 힘들게 하는 것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6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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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
정재승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
“대학은 융합연구의 무덤이다.” 얼마 전 한 대학 교수로부터 들은 이 말이 폐부를 찌른다. 대학 운영시스템은 본질적으로 융합연구를 홀대한다. 공동연구 실적은 절반만 인정해 주고, 다른 학과에 ‘겸임’을 한다고 해서 월급을 더 주는 것도 아니다. 연구비를 합쳐 장비 하나를 사기도 어렵고, 대학원생이 공동지도를 받으려면 애를 먹어야 한다. 동료 교수와 융합을 한다고 해서 딱히 제도적으로 득을 보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러니 간섭받기 싫어하고 자기 하고 싶은 연구만 하려는 대학 교수들이 서로 뭉쳐 융합연구를 수행하길 바라는 건 무리라는 얘기다.

지난 몇 년간 ‘융합’은 학계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 융합교육은 제대로 시키지 않았으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융합연구자들을 뽑는 데만 혈안이 됐고, 연구비는 무수한 선무당들에게 눈먼 돈이 됐다. ‘융합’이 구호가 돼버린 시대가 지나고, 이성을 되찾을 때쯤 학계는 ‘융합을 떠들던 사람들이 과연 어떤 성과를 냈는지’ 냉정히 검토할 것이다. 이 질문에 변변한 대답을 하려면 이제라도 몇 가지 변화가 필요하다.

우선 학생들이 융합연구를 꺼리지 않도록 학계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 무엇보다 융합연구를 할 수 있도록 ‘융합교육’을 해야 한다. 21세기 문제를 풀어야 할 예비연구자들이 20세기 학과의 틀에 갇히지 않도록 분야의 경계를 허물고, 융합의 기초를 다져주어야 한다. 주제를 탐구하다 학문의 경계에 맞닥뜨렸을 때 과감하게 넘어가는 연구자들을 길러내야 한다.

융합연구자 기존 학과에서 배척

가장 좋은 방법은 학부 때 기초과학을 두루 가르치는 것이다. 생물학과 컴퓨터과학을 함께 공부하고, 수학과 화학을 둘 다 배운 학생들을 세상에 배출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역사적 이해와 철학적 사고에 부족함이 없는 연구자들을 키워야 한다. 다른 학과 전공과목을 수강하는 것을 독려해야 한다.

연구를 위해서라면 학문의 경계를 쉽게 넘나드는 기초 내공이 깊은 연구자가 결국 세상을 바꿀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문과 이과 이분법에 사로잡혔던 학생들이 대학에서라도 이 ‘자기 낙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대학은 물리적 융합이 아닌 화학적 융합을 교육해야 한다.

융합을 하려는 학생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취업’이다. “교수님도 졸업은 기존 학과에서 하셨잖아요! 융합분야에서 학위를 받는 것은 위험해요.” 융합학과가 처한 현실이다. 우리 학계는 정작 사람을 뽑을 때는 융합을 ‘어중간한 분야’라고 생각해 기존 학과에서 배척하는 경향이 강하다. 신경물리학을 전공하면 물리학분야에선 “쟨 물리학자가 아니야”라고 얘기하고, 신경과학분야에선 “쟨 신경과학자가 아니야”라고 한다. 양쪽에서 배척받는 분위기에서 학생들이 융합분야에 뛰어들려면 ‘비현실적인 용기’가 필요하다.

한국연구재단이 ‘융합분과’를 따로 두어 융합연구자들을 지원하는 것에는 한계가 많다. 온갖 분야가 뒤섞인 융합분야란 얼마나 다양한가! 학문분야가 5개만 있어도 그것들의 다양한 융합은 20종이 넘는다. 이 간단한 수학도 못해 ‘단일 분야’인 양 같은 방식으로 평가하니 융합연구 제안서에 대한 심사의 질은 대개 형편없다. 연구제안서가 제대로 된 전공자를 만나기도 힘들다.

융합연구는 양쪽 개별분과에서 함께 심사해야 하며, 재단 융합분과는 융합연구에 추가적인 혜택을 주는 역할만 해야 한다. 융합의 성과는 양쪽 모두에 동등하게 돌아가야 하며, 두 분야가 융합하면 2배의 연구비가 아닌 훨씬 더 많은 연구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화학적으로 결합된 융합연구는 ‘더하기’ 지원이 아닌 ‘곱하기’ 지원을 해주어야 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융합이 각별한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융합은 벼슬이 아니며, 유세할 분야도 아니다. 불이익만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융합연구자들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끼리 공동 연구할 수 있도록 그 터를 잘 마련해 주면 될 일이다.

공동연구의 틀로 가둬서도 안돼

융합은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융합을 해야 하는 것은 나노물질이나 뇌, 암 등 중요한 연구대상이 한 가지 접근으론 이해가 불가능하며, 다양한 접근을 통해서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복잡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제들을 제대로 탐구하기 위해선 융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드시 2, 3개 분야 사람들이 한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는 식으로, ‘공동연구의 틀’ 안에 융합연구를 가두어서는 안 된다.

지난 세기 학자들은 ‘한 우물을 파라’는 격언을 금과옥조처럼 여겼다. 이 무거운 테제로부터 벗어나 2, 3개 분야를 넘나들면 바로 ‘얄팍한 연구자’로 전락한다. 나는 예비연구자들에게 만약 우리가 한 우물을 파야 한다면 그 우물을 학문의 경계에 파라고 권하고 싶다. 그곳은 지금까지 아무도 제기하지 않았던 문제들의 보고이며,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해결책들의 창고다. 그 안에서 21세기 문제를 21세기답게 해결하길 바란다.

정재승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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